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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솔] 버려진다는 것은

취_직 2016. 1. 9. 23:42

"그게 무슨 소리야, 너 미쳤어?"

권리모의 날선 목소리가 쟁쟁히 빈 교실을 울렸다. 내가 침묵했기에, 뒤를 잇는 것은 권리모의 거친 숨소리 뿐이었다. 권리모가 화를 낼 것은 진작에 예상했었다.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함께 로봇을 만들 때만은 연신 웃어주던 놈이었으니까. 서로를 욕하고 무시하면서도 착실하게 정을 쌓던 녀석이었으니까.

"차도운, 너도 뭐라고 좀 해 봐. 왕소라가 드디어 미친 게 틀림없어. 그만두겠다잖아!"

그리고 그 외침에 자연스럽게 권리모와 나의 시선은 동시에 도운에게로 향했다. 이제 그만두겠다는 나의 선언을 들은 후부터 도운은 내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곁눈질로 살핀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권리모의 분노에 찬 혼잣말과 나의 계속되는 침묵에, 도운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평소처럼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는 소라를 믿어. 소라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도운치고는 의외의 행동이어서 나는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권리모처럼 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나를 붙잡을 줄 알았는데. 몇 번이나 그랬듯이, 나를 붙잡고 설득할 줄 알았는데.
하, 하고 권리모가 어이없다는 한숨을 쉬던 것이 기억난다. 도운은 그것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권리모가 격앙되어 나와 도운에게 몇 마디를 더 쏘아붙였지만, 나도 도운도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버리는 것은 나인데도, 버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도운은 일이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조용히 체념하고 대상을 이해하려 애쓰는 성격이었다. 화를 내는 것은 권리모의 역할. 경멸하는 것은 나의 역할. 그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예상된 결과였다. 그가 말했듯이 그는 나를 믿었으니, 떠나는 내게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내게는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적당한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에게서 묘한 배신감마저 느꼈다. 배신이라니, 오히려 그들이 내게 붙여야 할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지만 그랬다. 나는 차도운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당혹스러울 만큼이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등을 돌려 교실을 걸어나왔다. 권리모는 내게 끝까지 고함을 질렀다.
그들을 두고 돌아서서 교실을 나오는 나의 뒷모습은 어땠을까. 셋이 함께한, 거의 완성된 프로젝트의 결말을 짓지 않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차갑고 매정한 왕소라로 기억되었을까.
그러나 사실 나는 뒷문을 열면서도 오히려 도운이 나를 등지고 있는 것만 같아서 돌아보지 못했다. 내게서 등을 돌린 도운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상상돼서, 나는 떨며 눈물을 참았던 것 같다. 굴욕과 서운함. 그리고 마음 속으로 되뇌었던 애원들. 나의 벼랑 끝에서 현실에 발을 내딛으며 곱씹었던 흐느낌들.

안 돼, 도운. 날 버리지 마.
나를 이렇게 버리지는 마.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 날로부터 시간이 흘러 멀리 떨어진 지금, 네 얼굴을 보며 그 기억을 떠올린다. 이상하게도 그런 기억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네가 떨어지기 직전의 나를 찾아낸 이런 순간에는 더더욱.
버려진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그 때 네가 나를 붙잡아주길 바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서야. 네가 나를 잡았어도 과연 내가 아버지의 집착과 가문의 굴레에서 도망칠 수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과가 어찌 되었든.

그리고, 이제 너도 내게 버려졌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도운. 너는 나를 사랑하니까. 내가 너를 붙잡기를 바라니까. 한 번만 나를 용서해 달라고, 나와 함께해 달라고 하기를 바라니까.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너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나는 나의 고통을, 또 너의 고통을 덜기 위해 악을 쓴다. 악당이 된다. 날 너랑 같은 레벨로 취급하지 마.

하지만 너는 여전히 울 것 같은 표정이다. 버려지는 이의 눈빛이다. 나를 내려다보는 너의 눈빛이 너무나도 간절해서, 나는 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추락 직전에조차 눈을 감지 않는다. 버리고 싶은 건 네가 아니었는데. 원망해야 하는 것도 네가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너는 죽는 날까지 나를 원망하겠지.

사실 나도 그래, 도운. 떨어지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나인데도, 이상해. 모르겠어. 버려지는 것 같아. 허공을 가르는 아찔한 감각에도 덮이지 않는, 이 상실감이라니. 이제는 정말 끝이라고 믿었는데. 모두 포기했다고 다짐했는데.

아마도. 나는 너를 사랑했겠지. 네가 나를 구원해 주기를 바랐겠지. 우리는 아무도 누군가를 구할 수 없는데도. 우리는 결국 서로에 의해 버려질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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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이야기 중 쓰고 싶었던 것을 마침 전력 주제가 좋길래.... 무임승차....(노답

장필순 - 그대로 있어주면 돼, Tom Odell - Long way down만 들으면서 썼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