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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림솔] 산하엽

취_직 2016. 8. 5. 00:03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다. 침대 옆에 발갛게 빛나는 전자시계를 보니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새벽이었다. 보통 이런 시간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좋은 것이 없다.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키는 사이 초인종 소리는 점점 빨라져 열 번도 더 날카롭게 울렸다. 대체 어떤 미친 놈이야. 가디건을 걸치고 안경을 찾아 쓰는 찰나, 불청객은 뭐가 그리 급한지 문까지 거칠게 두드려대고 있었다. 쿵쿵쿵쿵쿵. 그 소리에 맞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쯤 되니 무슨 심각한 일이 생겼나 싶어 마음이 급해져서,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나는 대문을 열어재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어떤 계시에 가까운 느낌이었던 것 같다. 흔들리는 먹구름을 찢는 빛나는 회색 번개와도 같은, 강렬한 확신. 가슴이 아프기까지 한 불안감.

 차갑고 눅눅하고 습한 공기가 피부에 먼저 와닿았다. 냉기에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얼어붙고 말았다. 잠은 모두 달아나버렸다.

 비에 흠뻑 젖은 왕소라가 서 있었다.


 “넌 다 알고 있었지.”

 “......”


 왕소라의 짧고 검은 머리카락이 온통 축축해져 창백한 뺨 위로 달라붙어 있었다. 현실감을 잃어버려 굳은 내 입보다 그녀의 입이 먼저 열렸다. 그리고 그녀의 그 말을 듣자, 나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앞뒤를 잘라먹은 말이었어도 나는 이해했다.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곧 절망에 휩싸였다.


 소라는, 알아버렸구나.


 그랬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에게만은 말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간절히 바랐다. 기도하며 살아온 삶도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신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기를 바랐다.

 왕소라가 그냥 이대로 남은 시간을 살아가기를. 그녀의 예민하고 또렷한 눈이 실핏줄로 붉게 물들지 않기를. 그 희고 가는 손가락들이 고통에 떨지 않기를. 영영 무한한 시간 동안 아무 것도 모르기를.


 내 그런 행동들이 소용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부디.


 순식간에 손바닥이 날아왔다. 눈에 보일 만큼 심하게 떨고 있는 젖은 손에는 힘도 없었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힘겨워 나는 맞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왼쪽 뺨이 차가웠다. 와중에도 태연하게, 왕소라, 비 계속 맞으면 감기 들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안으로 들일까 싶어 한 발짝 물러서자,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그녀가 내뱉었다.


 “권리모, 넌 정말 개자식이야.”


 나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녀는 무표정했다. 내가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고만 있자 가늘고 파란 목울대가 꿈틀댔다. 죽음을 앞둔 벌레처럼. 나는 시체처럼 차가울 그녀의 목덜미를 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우리의 친우, 도운의 결혼.

 기뻐해야 할 그 소식이 서운해질 때마다, 그는 그만한 행복을 가질 자격이 있어, 라고 되뇌이곤 했다. 그는 빛 속의 인간이야. 나와 왕소라와 셋이서 어울릴 수 있던 시간이 기적과도 같은 이상한 일이었던 거지. 우리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아. 도운은 우리와는 다른 인간이야.

 아내와 함께 있는 도운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 풍경이 그가 응당 있어야 할 곳이었다. 완벽하고 완전했다. 눈이 시릴만큼 눈부셨다.


 나는 알고 있었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왕소라의 눈먼 동경을 동정했다. 가망 없는 사랑을 하는 그녀의 바람을 지키고 싶었다. 아마 자기연민과 같은 맥락이겠지.

 도운을 바라보는 왕소라의 눈이 빛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나는 달군 돌조각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희망에 사로잡혔다가 절망으로 내동댕이쳐지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희망에 취하지도 못할 것이다. 전부 끝났다. 어차피 도운이 시작했던 관계였다. 도운이 없었다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감정들. 애정들. 미련의 찌꺼기들. 도운이 없다면 더 이상 의미도 이유도 없는 추억의 잔예들.


 "감기 걸려...... 일단 들어와."


 내가 대신 목에 메었다.

 그녀는 의연하려 애썼다. 늘 그랬듯이, 자신의 꿈이 좌절될 때마다의 버릇처럼, 손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것이다. 빌어먹을 감정의 물살이 그녀를 꺾지 못하도록. 손을 잡아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는 도운이 아니니까.

 나는 권리모. 빛 속에 있는 도운만을 응시하는 어둠 속의 왕소라를 사랑하는 권리모. 왕소라가 나를 보게 만들 만큼 빛 속에 있지도, 차라리 내게 안기라고 소리칠 만큼 어둠에 속하지도 않은 멍청하고 무능하고 이기적인 권리모. 나는 도운에게 왕소라의 진심을 말하지 않았다. 또한 왕소라에게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왕소라의 본질은 고통이다. 절망이고 괴로움이다. 나는 그걸 알았고, 또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무너뜨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녀의 위태로움을 갈망하면서도 더 이상 그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를 생각할 때면 항상 드라이아이스가 떠올랐다. 영점 아래의 온도. 주위에 존재하는 사람 모두의 숨통을 틀어막고, 남김없이 전부 소진되는 아름다움.

 왕소라는 불행해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이야. 절벽으로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다고. 그녀 주변에 머무르면 같이 불행해질거야. 나는 안 돼. 그녀를 구할 수 없을 뿐더러 지탱할 수 조차 없어. 도운이었다면 모르는 일이겠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못 해.


 "돌아갈게."


 내 길고 긴 머릿속 혼잣말의 틈을 비집고,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차 싶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절대 쏟아지지 않을 눈물이 가득 괸 완벽한 그녀의 옆얼굴을 응시하면서, 나는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버렸다.

 왕소라는 내 모든 생각을 읽은 눈빛이었다. 그 이후에 내가 들었던 것이 그녀가 입 밖으로 낸 것인지, 나만이 들은 환청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도운도, 너도 나를 구원할 수 없어. 애초에 기대한 적도 없어. 오만하게 굴지 마. 내게 베푼다는 듯 행동하지 마. 내가 불행으로 죽어버린다 해도 그건 내 몫이야.


 왕소라는 왔던 것처럼 빗속을 걸어갔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그녀를 산산조각 내버릴 것 같았다. 마르고 희미한 그림자가 물안개에 가려 사라질 때까지 나는 허공을 응시했다.


 넌 젖을수록 투명해지는 꽃. 찢길수록 단단해지는 날개. 목이 졸릴수록 빛이 나는 별.

 왕소라, 제발. 제발 그만 아름답길.


 넌 추락하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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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오랜만에 완성한 연성......

마라만님 동림솔 연성에 뽕차서 예전부터 쓰던거 부랴부랴 끝을 봤다

샤이니 종현 산하엽 들으세여 여러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