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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숭흉] 탈피

취_직 2016. 11. 6. 06:19

 태어나서 처음으로 억울함을 느꼈던 적이 언제였더라.
 
 나는 잊지 않았던 기억들을 입속에서 읊조렸다. 망설이지도 않고 그것들은 튀어나왔다. 태초의 기억이 흐릿했다. 맞아, 나는 차별되고 구별되기 위해서 세상에 나온 몸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혀가 짓씹혔다. 빌어먹을. 어느새 불쾌한 기억들은 밀려나고 욕지거리가 입 안 가득 자리를 차지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래, 나는 자궁 밖으로 끄집어낼 때부터 남달랐고 그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남들과 달랐다.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 철들 무렵부터 안에서는 껍질을 벗고 밖에서는 적을 만들었다. 내 몸 안에는 터질 듯한 열기가 가득했고 그걸 본 사람들은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그것 또한 억울한 건 매한가지였어도 가만히 앉아 수를 놓으며 열을 삭히는 억울함보다야 나았다. 나의 역사는 곧 속박과 굴레의, 납작 엎드려야 하는 이가 고개를 드려는 투쟁의 역사였다. 抑鬱. 누를 억과 막을 울이라니. 내 인생을 이토록 잘 대변해 주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신이 되고 싶다고 결정했을 때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꿔 말하면 나는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잃을 것도 떨어질 곳도 없이 강하다고. 더 이상 눌릴 수도 막힐 수도 없다고.
 
 “흉.”
 
 나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씹어뱉었다. 흥분으로 거칠어진 숨이 발음 사이로 뒤섞였다. 그녀는 태연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아씨. 화답하는 목소리는 참으로 건방지게도, 당황한 기색도 떠는 모양새도 보이지 않았다. 당장, 그거, 내려놓게. 말보다는 신음에 가까운 발음들이 간신히 문장을 이루었다. 보랏빛 입술이 호선을 그었지만, 오른쪽 관자놀이에 차갑게 닿은 총신을 붙든 그녀의 손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려 안간힘을 썼다. 아씨. 흉은 나를 한 번 더 부른 후,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아씨의 안위를 위해섭니다. 저 하나만 희생하면 돼요.”
 
 눈을 질끈 감고 미친 듯이 고개를 내리저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명백하게 나를 방해하려는 세력 중 하나의 짓이다. 그녀가 누구에게 어떤 협박을 들었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나는 맹세코 그들을 찾아내서 내게 애원할 때까지 경을 치고 죽여버릴 것이니, 그녀는 나를 위해서라는 같잖은 변명을 하며 이런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도리질은 계속되었고 가지런하던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흉은 미묘한 표정을 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내 머리카락을 빗어주던 사람이었다. 그걸 떠올리자 명치께가 타들어갔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씨. 잘 들으세요. 이젠 제가 없어도 혼자 해내셔야 합니다.”
 “닥치거라. 나불대지 마라.”
 “접근해 올 자칭 충신들을 믿지 마세요. 약한 모습도 보이지 마세요. 벼랑 끝에 서도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세요.”
 “허튼 짓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게야. 너의 팔을 부러뜨리고 혀를 뽑을 것이야.”
 
 서로를 앞에 두고도 대화는 엇갈렸다. 악문 이가 갈렸다. 차마 발을 구를 수는 없었다. 내가 다가가려는 시늉이라도 하면 흉의 손가락이 쇠를 잡아당길 것만 같았다. 내 얼굴이 난생 처음의 꼴로 일그러지자 흉이 시선을 떨구었다. 굳게 힘을 주었던 턱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나는 분노했다. 흉. 으르렁거리다시피 엉망인 부름을 듣고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눈빛이 확고했다. 그건 충견에게서나 볼 법한 눈이었다. 흉에게 어울리지도 않았다. 궁에서 가장 못났던 시종, 거둬주셔서 감사합니다. 간신히 들릴 정도로 그녀는 속삭였다. 나는 거의 숨을 쉬지도 못할 만큼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씨, 최고가 되세요.”
 
 뼈를 부수는 격발음에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녀의 몸이 힘을 잃고 허깨비처럼 풀썩 쓰러지는 것은 찰나였다. 잠을 자듯 누운 등 밑으로 끈적끈적하고 적나라한 액체가 꿈틀꿈틀 바닥으로 퍼졌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손마저 땅에 닿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짐승처럼 그녀의 껍데기로 기어갔다.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잡자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네 년은 은혜를 이렇게 갚느냐!”
 
 양쪽 뺨을 타고 갈퀴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목이 메어 갈라지는 목소리로 절규했다. 네 이년, 감히 주인의 명을 어기다니. 네가 나를 거역하느냐. 큰 벌을 받아야 할 것이야.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나는 그녀를 거칠게 잡아안고 흔들었다. 내가 선물했던 귀걸이가 흔드는 대로 속절없이 흔들렸다. 정확히 이유도 모른 채 나는 미칠 듯이 억울했다. 삶이 내게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린 아이처럼 악을 쓰고 그녀의 품을 파고들어 얼굴을 묻었다.
 흉. 나의 시종이자 친구. 나의 심복. 나의 기반. 나의 허물이 찢겨나간다. 내 몸처럼 나를 감쌌던 존재가 강제로 분리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아마 죽거나 살아남아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산다 한들 그 생에 의미는 있는가.
 흉의 몸은 아직 따뜻했다. 우리가 어렸을 적, 견딜 수 없이 추웠던 겨울에, 억지를 써 끌어들여 한 이불 속에서 느꼈던 어느 날의 체온과 변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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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봉숭흉을 이런 걸로 쓰다니,,,, 흑흑
그만큼 마지막이 너무 강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