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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빈소라] 차가운 두 손

취_직 2015. 2. 21. 23:15

처음 와 보는 가족 별장은 크고 넓었다. 이런 종류의 모임에 나름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소라는, 그 웅장하고 고상한 건축물에서 뿜어져나오는 위압감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얼어붙은 연못에는 눈이 쌓여있었다. 한참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정원을 가로지르며, 소라는 숨을 길게 내뱉었다. 새하얀 입김이 흐린 하늘에 녹아났다. 그 풍경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소라는 언 손을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거리다 문득 어젯밤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떠올렸다.

소라야, 이번 명절은 일가친척들이 모두 모이는 날이 될 게다.

엄숙하고도 어딘지 모르게 노기가 섞인 듯한 아버지의 음성에, 소라는 꿇어앉은 무릎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항상 아버지는 그런 음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녀는 아버지 앞에만 서면 잘못을 저지른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사실 평소 자신이 꽤 훌륭한 학생이라고 자부했지만, 어쩐지 아버지를 마주하면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버지가 이름을 부를 때면, 소라는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머리카락이 삐져나오지는 않았을지, 치맛자락이 올라가지는 않았을지, 설마 단정하지 않더라도 그 누가 신경쓸까 싶은 손톱 길이까지 걱정하다 보면, 목소리는 잦아들고 시선은 발끝까지 내려가기 일쑤였다. 언젠가 소라는 어쩌면 자신이 자신이라는 사실도 아버지 앞에서는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해낸 날에 그녀는 울었다.

실망시키지 말거라.

피식, 자조적인 웃음이 터져나왔다. 실망시키지 말라니, 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가. 보통 실망에는 기대라는 전단계가 전제되어 있지만, 소라의 경우에는 그게 없었다. 아버지의 실망시키지 말라는 말에는 '또다시'라는 단어가 포함되어 있었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아버지의 기대에는 미친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소라가 모든 행동에 실패를 가정하기 시작했던 것은.
눈 안쪽이 뜨거워져 소라는 발걸음을 멈췄다. 저 거대한 전쟁터 속으로 걸어들어가야 하는 시간까지는 조금 여유가 남아있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다 그늘진 곳에 벤치가 하나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누가 자기를 알아보고 부를까봐, 걸음을 재촉해 벤치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 차가운 손가락을 닫힌 눈꺼풀 위에 올려놓고는,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해야 한다. 나는 해내야만 한다. 오늘이야말로 아버지는 웃으면서 나를 칭찬해 주실 것이다.

"Hey."

갑자기 튀어나온 누군가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 멀리 나무 그림자 속에서, 작은 몸집의 소년이 소라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소라는 몸을 작게 떨었다. 아직 앳되어 보이는 아이는 고개를 갸웃하며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다 노랗게 죽어버린 잔디가 소년의 발에 스치며 사박사박 고요한 소리를 냈다.

"Sister, 울어?"

모국어도 외국어도 아직은 어눌하기만 한 말투에, 소라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대답을 기다리는 초록빛이 감도는 눈동자에, 그녀는 고개를 저어주었다. 그러나 원래 정말 울고 싶은 사람은, 우냐는 질문을 받으면 더 눈물이 나는 법이다. 소라는 순식간에 볼에 흘러내리는 온도 높은 액체에 당황해 얼른 눈물을 훔쳤다. 소년은 그런 소라를 말없이 올려다보기만 했다. 반대쪽 눈에 공평하게 흐르는 눈물을 다시 한 번 닦으며, 소라는 황급히 변명했다.

"지금, 이건...... 날씨가 추워서......"
"It's all right."

우습기도 하지. 소년의 위로라고 하기도 무안한 가벼운 인사가, 위안이 되었다. 다 괜찮아. 그 우스꽝스럽고도 식상한 영어 표현에, 소라는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터뜨려버렸다. 긴장이 풀려버리자 감정이 쏟아져나왔다. 아버지가 그토록 혐오하시는 나약하고 멍청한 감정들이. 그리고 그건 나쁘지 않았다.

"Sister."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소년이 약간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소라의 옷자락을 잡았다. 그제야 고개를 든 소라는 약속시간이 다 된것을 알아차렸다. 여기 있는 걸 보니 이 아이도 왕씨 가문의 아이겠지. 아마 나와 같은 시간에 안으로 들어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혹시나 소년이 방금 전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에 대해 어른들에게 이야기할까봐 조바심을 품던 소라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저택을 향해 걸어가는 아이를 보고는 안도했다.

"얘, 같이 가."

소라가 부르자, 소년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마당에 서 있던 가로등에 불이 켜졌고, 소라는 주위의 공기가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소년은 소라에게 손을 내밀며 부드럽게 웃었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아이였지만, 그녀는 친구가 하나 생긴 기분이 들었다. 이 춥고 황량한 곳에서 유일하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 소라는 뛰어가 아이의 작은 손을 잡았다. 얼음장같은 두 손이 맞부딪히고, 단단히 얽혔다. 물리적으로는 조금도 따뜻해지지 않겠지만, 소라는 소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Happy new year, sister."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그 둘의 첫 만남이었고, 소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훤빈과 손을 잡았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소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훤빈을 미워하지 않았던 순간이기도 했다. 그 날의 어른스러운 표정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이해하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은, 이미 모두 늦어 버렸던 어른의 시간.

그 때 너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좀 더 편하게 너를 저주할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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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아 왜이렇게 요즘 아크니가 좋은지 모르겠다ㅠㅠ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글로 풀어주는 기계가 있었으면 좋ㅎ겠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