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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훤빈소라] The dying of the light

취_직 2015. 4. 28. 21:36

나는 그녀가 망가지는 순간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와 그녀가 재회했던 그 날, 나는 알 수 있었다. 이미 그녀는 침몰해가고 있었다.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바다 한가운데서 기울어진 난파선처럼.




​병원 입구에 서서 흐르는 땀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니 지금까지 걸어왔던 산길이 까마득했다. 아파트들이 레고블럭처럼 보일 정도로 높은 곳이었다. 겉옷을 벗어든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이셔츠가 땀으로 죄 젖어버려서, 단추를 두 개 풀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찾기 힘든 곳에 꽁꽁 잘도 숨었군. 사람 풀어 찾는 데만 돈과 시간을 얼마나 썼는지 당신은 알기나 할까. 한숨을 쉬듯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단 한 번도 직접 건네 보지 못했던 부름.

​"아크니......"

​그녀의 병실은 병원의 가장 높고 후미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한참을 더 계단을 올라야 했다. 동화 속 공주 흉내라도 내는 건지,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웃음이 한 웅큼 비어져 나왔다. 공주라니, 그건 정말로 왕소라에게 어울리지 않는 비유였다. 마녀라면 모를까. 그러고 보니 나도 공주를 구하러 탑을 올라가는 기사와는 거리가 있는 인물이었다. 꼭대기 층에 도착한 나는 걸음을 멈추고 키득댔다. 수백 번을 고쳐 생각해봐도 우리는 동화 속 주인공이 아니었다. 단 한 순간도 우리의 시간은 온전히 우리 것이 아니었다. 그래, 우리는 악당들이었다. 눈을 마주친 적도, 손을 잡아 본 적도 없지만 같은 길에 나란히 서 있던 나의 누이여.
​그녀는 추락했다. 한없이 높은 곳에서.
​누가 당신을 그 높은 곳까지 올라가게 만들었는가.




​병실 문 앞에는 절대 안정이라는 팻말이 반들거렸다. 나는 가볍게 문을 두드려 노크를 했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문고리를 돌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널찍한 1인실이었다. 창문 옆을 차지하고 있는 침대에는, 거짓말처럼 그녀가 누워 있었다. 모든 것을 잃고 자취를 감춰버린 아크니가, 거기 있었다. 모두가 그녀는 죽었다고 했지만, 나는 믿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쉽게 죽을 인간은 못 되었다. 그녀의 아버지도 그녀를 버렸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왕회장 몰래 사람을 사고, 정보를 모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를 찾아냈다. 그녀의 마지막 소식을 듣고 혀를 차대던 사람들에게 소리치고 싶었다. 이것 보라구, 그녀는 죽지 않았어.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갔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못 본 사이 얼굴이 꽤나 핼쓱해졌다. 알아본 바에 의하면 상당한 기간 동안 재활치료를 해야 하는 상태라고 했다. 하긴 그렇게 큰 사고가 났는데 멀쩡할 리는 없지. 사고 후유증 때문인지 잠을 자는 동안에도 그녀는 편안해 보이지 않았다. 찌푸려진 이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나는 그녀가 항상 고통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니다. 나는 그녀가 그늘 없이 웃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그녀를 싸고 있던 절망과 압박과 자기혐오의 어둠을 뚫고 한 줄기 빛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던 순간을 나는 안다. 그리고 얼마 전 아크니는 자신의 손으로 그 빛을 덮어 버렸다. 자신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차도운과 권리모와의 관계를 그녀는 끊어냈다. 자신의 목을 조르던 바로 그 어둠을 위해서였다.
​나는 그녀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넘겼다. 연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당신은 한없는 악이 되기엔 너무 감상적이었다. 당신의 아버지는 그런 당신을 항상 채찍질했고, 그건 누가 봐도 가혹했다. 왜 그렇게까지, 하고 나는 가끔 속으로 묻는다. 왜 그렇게까지 그는 당신을 몰아붙였나. 또 왜 그렇게까지 당신은 필사적이었나. 아버지의 관심에 목마른 아크니의 행동은 필사적이라는 말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그녀라는 지옥의 유일한 동앗줄이 아버지라고 믿었던 것 같다. 부정하고 싶겠지만 당신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사람이다. 끔찍하게도 다른 누군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냐고 묻는다면, 한 마디로 설명할 수 있다. 내가 그런 사람이니까. 그리고 당신은 나와 같은 부류니까. 우리는 같은 우리 안에서 길러진 모르모트니까.

​“뭐야.”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멈추었다. 어느새 깨어난 아크니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에 실핏줄이 어리는가 싶더니, 별안간 그녀는 내 손을 뿌리치고 일어나 앉았다.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녀의 목에서 죄다 갈라져버린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그녀의 단정한 입매가 일그러졌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긴 어떻게 찾아온거지?”
​“Hmm, 내가 못 하는 게 있던가?”
​“헛소리 말고 똑바로 말해!"

​순간 왼쪽 귀 옆으로 뭔가가 스쳐지나가더니, 이어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탁자에 놓여 있던 화병이 산산조각 나 있었다. 그녀는 숨을 몰아쉬다가 미친 듯이 기침을 해 댔다. 내가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헛손질을 해가며 머리맡의 약병 하나를 잡았다. 한눈에 보기에도 향정신성 의약품으로 보이는 그것을 그녀는 열려고 애썼으나 희고 마른 그녀의 손가락들은 힘없이 미끄러지기만 할 뿐이었다. 나는 약병을 낚아챘다. 아크니가 내게 달려들었다. 나는 그녀의 양 손목을 붙들고, 간단히 제압해 침대에 앉혔다. 그녀는 입술이 새하얘지도록 이를 악물었다. 문득 서글퍼졌다. 당신을 올려다보던 시절이 있었다. 한때는 잘난 당신을 증오하기도 했었다. 왕회장의 신임을 얻는 것이 나에게도 중요한 일이었고, 당신은 나보다 그 면에서 앞서 있었으니까. 실제로 나는 꽤 오랜 시간동안 당신을 적대시했다. 그러나 머나먼 당신을 올려다보며 열등감과 질투에 몸부림을 치던 때가 지금 무너져 땅바닥에 뒹구는 당신을 보는 것보다 나았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망가진거야.”

​그녀는 대답 대신 나의 눈을 피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그녀의 얼굴 위를 덮었다. 그녀는 천천히, 손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그녀의 그런 행동을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건 당신이 한창 꿈을 꾸던 날들의 정점이었다. 당신은 정다운 친우 두 명과 함께 유망한 로봇공학자로 떠올랐고, 그걸 꽤나 즐거워했다. 나는 그때까지 살면서 당신의 그런 얼굴은 처음 보았다. 그런 것이 꿈을 꾸는 얼굴이라는 걸, 나는 가져 본 적 없어도 알아차렸다. 나는 그 때 생각했다. 이 곳에서 벗어날 탈출구를 찾았구나. 그리고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당신이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당신의 아버지는 당신을 자신의 개인 서재로 불렀다. 그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나는 아직까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내가 똑똑히 기억하는 것은 한참 후에 당신이 시퍼렇게 멍든 뺨을 감싸쥐고 고개를 푹 숙인 채 그 방을 걸어나왔다는 것이다. 나는 몰래 당신의 뒤를 쫓았었다. 그리고 밤새 당신의 방문 사이로 새어나오는 흐느낌을 들었다.
​바로 다음 날, 당신은 그간 해왔던 꿈에 다가서는 꾸준하고 다정한 방식들을 모조리 그만두었다. 나로써는 이해할 수 없었다. 내게 만약 탈출구라는 것이 주어진다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 곳에서 도망칠 거지만, 당신은 아버지를 거역하기엔 너무 미련하고 무력했다. 그 날 이후부터 나는 그녀를 미워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녀는 나보다도 불행한 사람이었다.

​“Hey.”

나는 ​고개를 돌린 채 그녀를 불렀다. 젖은 얼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도 내게 등을 보이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버지가 나를 찾으신 거야?”

​그 질문은 한없이 덧없으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도 재차 묻지 않았다. 우리 둘 다 서로가 소모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자조적인 헛웃음을 내뱉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그녀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그녀가 경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말했다.

"Follow me. 갈 곳이 있어."

그녀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나를 뿌리치려 했다. 하지만 나는 강제로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마지막으로 마주쳤을 때보다도 훨씬 말라버린 아크니는 내 힘에 이끌려 휘청거렸다. 이 일그러진 역학관계에 입안이 씁쓸해졌다. 뼈가 드러난 손목을 틀어쥐자 그녀가 내게 욕설을 내뱉었다. 눈빛이 형형했다. 어쩔 수 없군. 나는 숨을 한 번 들이쉬고 그녀를 한 번에 안아들었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팔다리를 휘둘러댔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문을 향해 곧장 뛰었다. 지금쯤이면 미리 준비시켰던 밴이 병원 앞에 세워져 있을 것이다.




"이 미친 자식......"

환자복 차림 그대로 병원을 나오게 된 아크니는 차 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몇 번 잡아당기다 안에서는 열지 못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내게 이를 갈아댔다. 나는 이 모든 게 코미디 같아서 작게 키득거렸다.

"웃음이 나와? 넌 미쳤어. 당장 차 세워."
"No, 안 될 말이지. 그나저나, 의외로 무겁던데."
"닥치고 날 내버려 둬! 아버지에게로 가는 게 아니면 날 어디로 데려가려는 거야! 날 놀릴 생각이라면 그만둬!"
"Radio 틀어 줄까?"
"젠장! 넌 지금 기쁜 거겠지. 내가 실패했으니까 그 자리는 네 차지일 거라고 생각하겠지! 마음껏 비웃어! 너는 내 인생에 끼어들지 말았어야 했어! 평생 나와 마주칠 일도 없었어야 했어! 너 때문에......"

아크니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말을 멈췄다. 백미러를 힐끗 보니 그녀 특유의 감정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 내게 악담을 퍼붓는 도중에 몇 가지 사실이 생각난 것이 분명했다. 그녀만큼 나도 그 높은 곳을 두려워했음을. 우리는 모두 어쩔 수 없이 가해자가 된 피해자들이었음을. 단 한 순간도 이 처지를 원한 적 없었고 모든 건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었음을. 그리고 내가 그녀의 불행을 비웃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그녀를 불렀다.

"아크니."
"......"
"안전벨트나 매지?"

밴은 고속도로를 벗어나 굽은 비포장도로를 달렸다. 그녀는 끝까지 안전벨트를 하지 않았다. 맞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신사처럼 아크니 쪽의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덜컹거리는 험한 길로 들어설 때부터 그녀는 모든 걸 체념한 상태였다. 그녀는 간간이 창 밖을 보며 조용히 감탄사를 뱉었다. 그 때마다 나는 소리 죽여 웃었다.

"이 산구석에는 뭐하러 온 거야."

병실용 슬리퍼에 흙이 잔뜩 묻는 것을 불만족스럽게 쳐다보며 그녀는 투덜거렸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나무들 사이로 발을 옮겼다. 그녀는 짜증을 내며 나를 따라왔다. 동화처럼 깊고 깊은 숲 속으로 우리는 걸었다.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그 누구도 그녀가 누구인지를 기억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가 누군지를 잊을 만큼 우리는 걸었다.

그녀는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망연히 서 있는 그녀에게 나는 집사처럼 몸을 굽혀 설명했다.

"내가 간신히 준비한 비밀 별장이야. 나 외에는 아무도 소재를 몰라. 왕회장님까지도."
"......"
"재활을 위한 모든 것은 준비되어 있어. 고용한 사람들도 비밀 엄수는 철저할 거야."

한참을 침묵하다가 마침내 그녀는 중얼거렸다. 너무 작아서 겨우 알아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였다.

"미친 놈. 네가 이렇게 이타적인 놈이었어? 무슨 꿍꿍이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세상 누구보다도 이기적인 놈이다. 내가 이런 짓을 한 이유는 그녀를 나의 아바타로 여기기 때문이었다. 나와 같은, 그러나 나와 다른 사람. 그녀를 통한 대리만족을 원했다. 제발, 제발 행복해지길. 아니 적어도 불행하지 않길. 그래서 그녀를 끌고 와 이 곳에 인형처럼 놓아둔다. 악당이 아닌 주인공 역할로. 아크니가 아닌 왕소라로. 이건 실험이다. 우리가 과연 행복해질 수 있나, 에 대한 실험이다. 당신이 다 잊고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그러면 내게도 행복에 대한 가능성이 생길 테니까. 우리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증명해 줘.








불길이 치솟았다.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이렇게 모든 게 다 끝이다. 눈앞이 캄캄하다. 결국 권선징악의 법칙대로 악당은 자멸하고, 정의는 승리하는군. 나는 휘파람을 불었다. 완벽한 엔딩이야. 그렇고 말고. 내가 불에 타서 재가 되어도 사람들은 걸맞은 죽음이라고 떠들겠지. 나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웃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신음을 토해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엔진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한 보라색의 로봇이 불꽃 사이를 스치며 날아오고 있었다. 꿈을 꾸는 것만 같은 나의 바로 앞에 착지한 로봇의 가슴 부분이 열렸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이 나를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나약해 빠진 놈. 이게 무슨 꼴이야?"

순식간에 로봇의 손이 나를 들어올리더니 로봇 안에 마련된 좌석에 앉혔다. 앞에 설치된 모니터의 그녀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녀는, 왕소라는, 통쾌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걸로 너와 나 사이에 빚은 없는 걸로 하지."
"어떻게...... 여길......"

그녀는 홀가분하게 머리를 털었다. 의기양양한 그녀의 표정에 나는 멍해질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로봇이 급출진했다. 내가 의자 뒤로 넘어지자 그녀가 깔깔댔다. 그리고 언젠가 내가 그녀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했다.

"안전벨트나 매지?"

우리는 허공 위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세심한 조작으로 로봇을 저공비행시켰다. 건물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하는 것을 보며, 나는 떨리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매고 의자에 기댔다. 나란 인간은 이런 인간이었다.

왕소라, 나는 빌어. 아무도 읽어주지 않더라도, 이 세상 어딘가에는 우리들이 주인공인 동화책이 있기를. 그 안에서 아무도 상처받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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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봇 5주년 1p 앤솔로지를 위해 썼던 글 원본입니다. 분량을 줄여야 해서 앤솔에는 고치고 또 고쳐 들어갔지만 원래는 이랬다는거....... 매번 친절한 메일 보내주신 총대님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오지은의 '누가 너를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와 노엘갤러거의 'The dying of the light'를 새벽까지 들었던 기억만이 남아있네여

레트로봇에서 고인특집 해주면 좋을테지만 그럴리가 없겠지 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