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ME : 이채언루트 - Uneasy Romance



 처마 안으로 들어오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모처럼 꺼내 입은 여름 정장에 묻은 빗방울을 털며 혀를 찼다. 그렇게 굵은 빗줄기도, 오랜 시간 맞은 것도 아니었는데 구두 밑창이 젖어 발자국이 남았다. 나는 씁쓸함에 고개를 떨구고 새카맣게 물이 드는 회색 돌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벌써 피로연이 시작된 듯, 멀리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도운은 끝까지 즐기고 가라고 붙잡았지만 나는 일이 있다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빠져나왔다.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 식장을 나섰다가, 떨어지는 빗방울을 피해 황급히 건물로 돌아온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중간에 빠져나올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도운은 내가 세상에 자랑할 만한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런 친구의 결혼을 축하해주고 싶지 않을 리가.
 단지, 홀로 서서 그 모든 의식들을 지켜 보기가 너무 힘이 들었을 뿐이다. 마주 보고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눈을 맞추고 가끔은 서로의 손을 잡기도 하는 사람들 틈에서, 세상에 의미있는 건 단 둘밖에 없는 것 같은 눈빛을 한 도운과 소영 씨를 보는 것이.
 참 이상하지. 눈부신 조명과 기쁜 음악과 평생 아끼고 사랑하겠습니까, 하는 주례사와 신랑 신부의 행진이 이어질수록 왜 유독 짙어진 내 그림자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질까. 왜 나는 춥고 외로워져 눈을 내려깔고 이 자리에서 증발하듯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을 나는 섬처럼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소리를 부서지는 파도소리로 여기면서.

 어른이라는 건 곤란해. 벅차다는 이유로 도망치기가 어렵잖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노력했지만 잘 안 됐다. 같은 생각이나 바람이나 언어를 가진 누군가를 찾아내는 것이 드물다는 사실을 깨달은지는 좀 되었다. 그렇게 찾아낸 사람 또한 나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는 진실도. 떼를 써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도운의 결혼을 상상해본 적 없는 것은 아니다. 도운은 나와는 다른 부류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그의 행복을 관조하는 연습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외로웠다. 그래, 외로웠다.
 나는 싸아, 소리를 내며 치는 빗발을 응시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색한 입을 떼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는 오지 말아. 좋은 날인데. 도운이랑 소영 씨가 슬퍼할거야.

 "궁상떨고 있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새초롬한 눈빛과 마주쳤다. 딱 봐도 값나가 보이는 연보라색 원피스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특별한 날이라고, 클러치백을 든 손에는 네일아트까지 한 채였다. 심장이, 습기 찬 땅으로 내려앉았다.

 왕소라.
 소라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애써 잔뜩 무장한 표정이 흐트러지려 했기 때문에. 안 돼.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번 했다. 왕소라는 무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이를 악물고 태연하게 멀쩡한 척을 하며 말했다.

 "왔었어? 네 얼굴 못 봤는데."
 "방금."
 "왜 벌써 나왔어. 더 있다 가지."
 "너야말로 도망가다 비 맞은 거 아니야?"

 하하. 단단한 창 같은 것에 꿰뚫린 기분에 기침처럼 또 웃음이 터져나왔다. 재수없는 건 여전했다. 말로는 그 애를 이긴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돌렸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왕소라도 더 말이 없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비가 내리는 밖을 바라보았다. 얼마만에 만난 거지, 싶어 입속으로 숫자를 셌다. 육 년, 칠 년...... 그러고보니 우리 둘 다 오랜만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우리가 익숙한 밤낮을 함께했던 고작 몇 년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리자, 빗물이 갈비뼈 안쪽을 두드리는 것 같아서, 나는 가슴에 손을 짚었다. 왕소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뱉었다.

 "택시 불렀어. 같이 타고 가던가."

 가슴에 댄 손 아래로 맥박이 느껴졌다. 왕소라는 이래서 불편하다. 이 녀석 앞에서 나는 너무나도 쉽게 휘둘려버린다. 바보 같은 짓인걸 알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드는 것보다는 걔가 나았다.

 택시는 금방 도착했다. 뒷좌석에 몸을 밀어넣었는데, 당연히 보조석에 탈 줄 알았던 왕소라가 내 옆으로 들어와 차문을 닫았다. 출발해주세요. 내가 멍하니 그 애를 쳐다보는 사이에 평온한 목소리로 소라는 말했다. 택시는 벌써 고인 물웅덩이를 가르며 부드럽게 움직였다.

 택시 안은 라디오도 틀어져 있지 않아 적막했다. 나는 왕소라를 곁눈질했다. 그 애는 정말 나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자기 쪽의 창턱에 팔을 기대고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입을 비죽이다가 한숨을 작게 내쉬고 긴장을 풀려 노력했다. 시트에 머리를 기대니 힘이 쭉 풀렸다. 아닌 척 해도 내내 피곤했던 것일 터다. 문득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지만,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몸을 늘어뜨렸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소리에 자연스럽게 눈이 감겼다.

 "차도운 생각 하고 있지."

 그 말에 눈을 뜨자 왕소라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우리 사이의, 한 사람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자리에 한 손을 대고 어깨를 숙여 내게 다가온 걔는 뭐든 다 안다는 그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문문이 아닌 평서문이었다. 나를 비웃어 버리려는 듯, 입술 한 쪽이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또다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번에는 씁쓸하지만 새카맣지는 않은, 그러니까 연민의 웃음이었다. 바보야, 차도운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바로 너잖아. 그래서

 나는 그냥 고개를 기울여 그 애에게 키스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우리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사람들은 각자의 들쑥날쑥한 내면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퍼즐 조각과도 같은 그것은 다른 이의 것과 들어맞기도 하고 부딪혀 어긋나기도 한다고. 나는 왕소라와 나의 공통점은 도운과 연결되어야만 안정적인 모양새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도운이 우리의 삶의 궤적을 벗어나는 날들이 늘어나던 즈음에, 나는 소라와 함께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나와 그 애의 못나고 복잡한 톱니바퀴의 틈들을 닮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천천히 서로의 요철을 맞추었다. 작은 더듬이로 세상을 보는 눈먼 벌레들처럼. 가진 것은 시간뿐이라는 듯이 젊은 날들을 아무렇게나 보내가며.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다정한 말이나 상냥한 손길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함께 있었다. 소라는 어땠을지 몰라도 그 시절의 나는 불현듯 그녀를 맹렬히 생각하고는 했었다. 그녀의 누구와도 겹쳐지지 않는 마음과 자석의 반대극처럼 타인을 밀어내는 척력에 대하여.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 서있다가도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 몸이 떨리고는 했다. 로맨스라고 이름을 붙이기는 어려워도ㅡ

 내가
 너를
 사랑했었지

 ㅡ사랑이란 것을 했었다.

 왕소라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아서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에 대었다. 젖어 있지 않다는 것이 그녀다워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고 건조한 살결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그 애의 입술이 달싹거리더니 숨결이 느껴졌다. 나뭇잎만큼 여린 숨이었다. 그 순간, 각진 나의 모서리들이 흐물거리며 무너졌다.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 큰 싸움을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순간의 기억이 너무나도 힘겨워 나는 계절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 어떤 수열보다도 너무나도, 너무나도 어려웠던 한 철이었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러울 줄이야. 누군가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토록 절망스러울 줄이야.

 지금이야 그런 감정들은 흐르는 무수한 낮과 밤들에 무뎌져 날카롭게 나를 찌르지 않지. 우리는 이제 어리지 않고 각자의 사정을 계산하며 눈치나 보는 어른들이지. 그래도 우리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어, 소라. 신기하지 않아? 우리가 사랑을 했었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려 했었어.

 왕소라가 먼저 입술을 뗐다. 그녀는 곧바로 후회하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작게 고개를 저어보이고는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기사님, 여기서 세워주세요. 택시 기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여기서요? 네. 비가 이렇게 오는데...... 괜찮아요.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도로 한가운데서 택시가 멈췄다. 나는 문고리를 잡으며 왕소라에게 힘껏 웃어 보였다. 그녀는 내 눈을 보지 않았다. 나는 손을 건네듯이 말들을 뚝뚝 던졌다.

 "많이 말랐다. 밥 잘 챙겨 먹어."
 "......남말 하네."
 "나랑 만난 거 마음 쓰지 말고."
 "내가 그럴 것 같냐."
 "갈게."

 그 말을 뒤로 하고 차 문을 열어 빗속으로 발을 디뎠다. 차가운 비가 매섭게 온 몸을 때렸다. 권리모, 라고 그 애가 부르는 것도 같았고 나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한 발짝 물러서자 택시가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 선팅이 되어 있는 안쪽은 어두컴컴하니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왕소라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나는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택시가 서서히 멀어져가서 작은 점이 될 때까지, 흠뻑 젖은 팔을 좌우로 흔들었다. 내 모든 마음을 담아

 사랑하는 시절이 있었다는 이유로 살아가는 삶도 있지 않을까. 그 때의 감각들을 되새기며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사랑했어, 소라. 너도, 그 날들도. 그 짧은 시간들이 나의 모든 피와 살과 뼈를 구성해 나를 지탱해 준 것 같은 기분이야. 모든 것이 좋았어. 내게는 전부 완벽했어. 그러니까 이걸로 됐어.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우리는, 괜찮을거야. 다른 사람과 다시는 연대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떤 누군가를 찾아내지만 결국에는 어긋나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가 되자. 그렇게 마음으로 소리치니 외롭지가 않았다. 더는 외롭지가 않았다.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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