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런 날이 있다. 소라는 입술 끝을 짓씹으며 대로변에 서 있었다. 받은 의뢰는 손이 미끄러워 두 번째에 끝냈으며, 뺨을 적시는 가을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낭패였다. 오늘 같은 하루는 그 무엇도 말끔하게 끝이 떨어지는 적이 없었다. 머리가 지끈거려 그녀는 손가락을 단단히 세워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소라는 발을 내밀어 보도블럭에 몸을 기대고 잠들어 있는 거슬리는 소년의 몸을 툭툭 찼다. 비에 잔뜩 젖은 앳된 얼굴은 푸른 실핏줄이 다 비칠 정도로 창백했다. 새벽 네 시의 어둠 속에서 어슴푸레한 네온사인이 깜빡거리며 소년을 비추고 있었다. 소년은 소라가 조금 더 발에 힘을 주자 움찔거리며 길짐승처럼 웅크렸다. 더럽고 낡은 후드집업이 둥글게 말리는 것을 보고 소라는 더는 참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녀가 내지른 발길질에 소년의 머리가 아스팔트에 닿았다.

“아, 씨발. 뭐야.”

연필로 그어 놓은 듯했던 두 개의 짧은 직선이 천천히 열리고 또렷한 까만 눈동자가 소라를 올려다보았다. 얇고 새파란 입술이 달싹이고 가장 먼저 튀어나온 건 욕지거리였다. 소라는 정말로 더는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

“뭔데 자는 사람 깨우고 지랄이에요? 경찰?

“내가 경찰로 보이니?

소라가 고개를 까딱해 그녀의 검은색 라이플 케이스를 가리켜 보이자 소년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이 곳에서 청부업자라는 직업은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다. 소라가 증명이라도 하듯 케이스를 고쳐매자 분리된 금속들이 덜그럭대는 소리가 빗속에서 울려퍼졌다. 손가락으로 단번에 사람을 죽일 수 있게 하는 차가운 부품들이 서로 부딪는 소리다. 소라는 아연해진 소년을 내려다보며 태연하게 말했다.

“여기서 내가 죽인 거 아닌 시체 보기 싫으니까, 일어나.”

그러자 소년은 정말로 얌전히 일어난다. 입술을 굳게 악물고, 무엇보다도 죽음이 가장 두렵다는 표정으로. 그 두 눈에 번들거리는 공포가 소라를 건드린다. 찰나의 순간이지만 소라는 흠칫 몸을 떨었다. 그녀조차 잊고 있던 감각이 추위에 젖은 몸에 스며들어서, 소라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갈 곳은 있니?

“그래 보여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받아친 소년이 입매를 일그러뜨리며 자조했다. 후드 사이로 스치는 물기 어린 머리칼에서는 물방울이 떨어졌다. 있는대로 날은 세웠지만 청승맞은 길고양이 같은 그의 꼴에 한숨이 나왔다. 소라는 자신이 지금 소년을 동정하고 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답지도 않게……. 속으로 중얼거린 그녀는 한 번 더 심호흡을 하고 더 이상의 망설임을 그만뒀다.

“따라와. 재워줄게.”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소라는 하얀 입김을 길게 내뱉었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따뜻한 차를 마시며 한 대 피울 생각으로 그녀는 발을 뗐다.

“이름이 뭐니?

선심이라도 쓰듯이 던져진 그녀의 물음에, 소년은 고개를 돌려 소라와 시선을 마주했다. 소년이 이름 세 글자를 발음하자 아랫입술에 새겨진 잇자국이 서서히 사라졌다.

“권리모.”

 

 

 

2

 

 

 

 

벗겨진 장판과 습기 찬 신문지로 바른 벽의 원룸 같은 빈약한 상상을 했지만, 의외로 여자의 집 안은 깔끔하고 널찍했다. 단조로운 디자인의 무채색 가구들과 텅 빈 찬장은 오히려 주인이 이미 죽어버린 집 같은 감상을 줬다.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마치 관 속 같다고 리모는 생각했다.

짜장면 좋아해? 여자가 갑자기 그렇게 물었을 때 리모는 얼떨결에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종일 뭘 넣어본 기억이 없는 위장이 요동쳤다. 그녀는 익숙하게 휴대폰 자판을 눌러 음식을 주문했다. 요리는 안 해요? 리모가 물어보자 여자는 귀찮다는 듯 냉장고에 부착되어 있던 배달음식 책자를 그에게로 던졌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진작에 얘기하든가. 아뇨, 그런 건 아니고……. 대화가 어영부영 끊기고 어색한 침묵은 음식이 배달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부모는 있어?

“허구한 날 애새끼 패는 나잇값 못하는 인간들요?

나무젓가락을 반으로 떼자마자 정신없이 음식을 삼키던 리모는 여자의 질문이 무례하다고도 자각하지 못하고 아무렇게나 대답했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목 뒤의 흉터를 쓸었다. 양각으로 부풀어, 시간이 흘러도 삭朔이 되지 않는 잿빛의 그믐달이었다. 무심코 한 행동에 리모는 이마를 찡그리며 진득한 피가 묻은 마냥 손가락을 털었다. 여자는 그런 리모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젓가락을 움직여 면발을 씹었다.

“몇 살?

“열아홉이요.”

“집 나온 지는 얼마나 됐니?

“한 달 정도.”

“돌아갈 생각은 없어?

“전혀요.”

단호하게 이어지는 대답에 여자는 조용히 리모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릇을 밀어놓고 탁자 서랍을 열어 담배를 꺼내 지포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이고는, 그녀는 내뱉었다.

“어떻게 살려고 그래?

리모는 눈을 내리깔고 타들어가는 담배를 바라본다. 그런 건 별로 생각해본 적 없다. 삶을 계획해 본 적도 없다. 그냥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집을 도망쳐 나오고는 아예 미래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루하루 음식을 먹고 잘 곳을 찾는 것만을 생각했다. 리모는 입을 다물었다.

“나는 별로 좋은 사람이 아냐.”

…….”

“사람 협박하거나 죽여서 먹고 살고 있고.”

리모는 식탁 위에 올려진 여자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녀의 손톱들은 청결을 유지하기 위해서인지 바싹 깎여 있다. 담배개비만큼이나 가는 그녀의 손가락들이 방아쇠를 당기고 돈을 세고 수저를 들고 이불을 끌어당기는 것을 상상한다. 그건 좋아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하게 흉악해 보이지도 않다. 그저 살아있는 사람의 손이다. 산다는 것이, 주어진 삶을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복잡하고 끔찍한 일인지를 리모는 안다.

“귀찮으시면 지금 내보내셔도 돼요.”

리모가 그렇게 말하자 여자는 그를 똑바로 쳐다본다. 리모를 꿰뚫어보고 싶은 것처럼. 리모는 짜장면을 마저 먹기로 했다.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그냥 여기 있어.”

울리는 여자의 목소리에 리모는 그제야 그녀와 얼굴을 제대로 마주보았다. 여자는 여전히 무표정이다. 그러나 리모는 그녀의 눈에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 들어차는 것을 본다.

“이름이 뭐예요?

여자가 냈던 목소리를 최대한 선명하게 기억해보려 애를 쓴다. 그녀 자체가 희미한 사람이라 쉽지 않다. 최대한으로 따라한 억양과 어조에 얇은 입꼬리가 조금은 올라가는 것처럼 보였다. 리모는 알 수 없는 기쁨이 성냥이 켜지듯 뱃속에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설령 그 미소가 비웃음이었거나, 그 감각이 단지 빈속을 채움으로써 떠오른 포만감이었다 해도, 그녀는 분명한 대답을 해 주고 리모는 그것을 기억한다. 그는 한 번 외운 것은 잘 잊지 않는다.

“왕소라.”

 

 

 

3

 

 

 

 

소라는 마룻바닥에 홑이불을 깔다가 인상을 썼다. 비가 내려서인지 바닥은 한기가 감돌 정도로 차가웠다. 혼자 지내왔기 때문에, 따뜻해질 정도로 덮을 수 있는 이불도 없었다. 리모를 바닥에서 재우면 아마 새벽쯤에 꽁꽁 얼어버릴 게 뻔했다.

“저 다 씻었어요.”

리모는 욕실에서 더운 김을 몰고 나왔다. 악취나는 더러운 옷들을 참지 못한 소라가 그것들을 세탁기에 던져넣고, 옷장에서 찾아내 건낸 품이 큰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는 다행히도 마른 소년의 몸에 맞았다. 개운하게 기지개를 켜던 리모는 소라의 표정을 보고는 재빠르게도 이유를 눈치챘다.

“괜찮아요, 바닥에서 자도! 저 노숙도 꽤 했고!

“안 죽은 게 용하다.”

“그렇지만 침대에서 같이 잘 수는…….”

손을 내저으며 예의바른 시늉을 하는 리모를 보고 소라는 어이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잠버릇 있어? 아, 아뇨……. 그럼 됐어. 올라와. 소라는 바닥에 늘어놓았던 이불들을 한번에 걷어 침대로 올렸다. 뻣뻣하게 선 리모가 어색하게 중얼거렸다.

“침대에서 자는 거 처음이에요.”

소라는 새어나올 뻔한 웃음을 참았다.

“별 거 없어.”

 

스위치를 누르자 불이 꺼졌다. 순식간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침대 안은 평소보다도 따뜻했다. 출렁이는 매트릭스가 이상한지 리모는 몸을 조금 뒤척였다. 소라는 그에게 닿을까봐 팔을 당겼다. 파자마 끝이 침대 시트를 스치는 소리가 났다. 리모가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감사합니다.

그러자 소라는 문득 귀가 간지러워졌다. 빗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소년은 점차 규칙적으로 숨을 쉬었다. 빨리 잠드는 게 어린애 같았다. 내일은 야광별이라도 사서 천장에 붙여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다 소라는 눈을 감았다.

 

 

 

4

 

 

 

 

리모는 소라의 뒤를 따라 더럽고 좁고 복잡하게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걸었다. 도착한 곳은 작은 술집이었다. 소라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몇몇 사람들이 아는 체를 했다.

“오, 누님. 웬 남자를 옆에 끼고 왔어?

“내가 키우는 애야. 업자 데뷔 시키려고 왔어.”

리모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소라를 흘겨보며 바에 착석해 맥주를 주문했다. 소라의 집에 머무른지 세 달이 지났고 리모는 법적으로 성인이 되었다. 소라에게 청부 일을 돕겠다고 하자 그녀는 싸늘한 경멸을 표했다. 이런 일 뭐가 좋다고 하고 싶어해? 내가 도울 수 있으면 좋잖아요. 나 잘 할 수 있어요. 너 같은 어린애한테 도움받을 일도 아니고, 그럴 처지도 아냐. 소라는 서늘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못박았다. 너, 이쪽 일에 절대로 손 댈 생각 마.

“저 아줌마는 잘도 드나드네.”

“실력 좋다잖아.”

“그래봤자 이젠 다 늙은 퇴물이지.”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리모는 옆자리의 두 남자의 대화를 듣고 입매를 씰룩였다. 소라는 리모에게 일에 관한 것을 철저하게 숨겼지만 리모는 몇 달 동안 그녀의 생활패턴과 인터넷 검색으로 이쪽 세계의 이런저런 정황 정도는 알게 되었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업무가 있는 날의 소라는 엄청나게 예민하고 날카로워졌다. 리모는 소라가 서른 한 살이고 엄청난 완벽주의자이며 집중할 때는 주위를 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녀가 나이프와 총기들을 관리할 때의 모습은 거의 신비로울 정도였다. 적어도 소라는 여기 있는 누군가의 모욕과 비아냥을 들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리모는 자리에서 일어나 남자들이 앉은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테이블에 놓인 안주용 포크를 집어서 있는 힘껏 휘둘러 한 남자의 손에 꽂았다. 그의 비명이 순식간에 술집을 가득 메웠다. 맞은편의 남자가 리모에게 달려들었고 리모는 유연한 몸놀림으로 그를 피하고는 팔뚝에 포크를 박아넣었다. 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바닥을 굴렀다. 리모는 뺨에 튄 피를 닦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술집 안의 모두가 조용해져 그를 보고 있었다. 리모는 사람들 속에서 소라와 눈이 마주쳤다. 소라는 한숨을 쉬며 그에게로 걸어와 귀를 잡아당겼다.

“소란 피우지 말라고 했잖아.”

“아, 저 새끼들이 먼저 헛소리 하잖아요.”

“무슨 그런 일로 소란을 피워.”

말을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의 얼굴 표정이 풀어져 있는 걸 알아챈 리모가 킥킥거리자 소라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 데려온 건, 이 구역에서 아무도 너 못 건드리게 하려는 거니까 제발 조용히 있어.”

엄포를 놓은 소라는 리모를 놓아주었고 술집 안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시끄러워졌다. 리모는 다른 지인에게로 가는 소라를 쳐다보며 투덜거렸다. 나를 무슨 어린애로 알아. 리모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김빠진 맥주를 들이켰다.

“안녕하세요.”

어깨에 닿는 손에 뒤를 돌아보니 모자를 눌러쓴 안경 쓴 남자가 사람 좋게 웃었다. 이런 장소에 정말로 어울리지 않는 투박하고 평범한 얼굴이었다.

“저는 차도운이라고 해요. 왕소라 씨 일행이신가요?

남자의 입에서 소라의 이름이 나오자 리모의 근육이 수축했다. 금방 경계하는 리모의 태도에 자신을 도운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난처한 표정을 했다.

“다른 건 아니고요…… 저는 개인적으로 소라를 아는 사람이거든요.”

소라는 자신의 이야기를 많이 하지 않는다. 그녀의 인간관계는 거의 전무한 듯했다. 리모는 미심쩍은 눈으로 도운을 훑어보았다. 도운은 하하 웃으며 리모의 옆에 앉았다.

“놀랐어요. 소라가 옆에 누군가를 두다니.”

“난 당신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데. 무슨 관계예요?

잔뜩 날이 세워 묻자 도운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리모에게로 가까이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췄다.

“저는 몇 년동안 소라를 구하려고 움직였어요.”

구하다니? 리모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소라는 누군가에게 구해질 일이 없었다. 그녀는 독립적이고 강하며 늘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위치였다. 그런 그녀를 구한다니, 어불성설이다.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는 리모에게 도운은 설명을 시작했다.

“소라는 국내 굴지의 폭력조직 보스의 딸이에요. 가족간의 불화인지 혼자 떨어져 나와 청부업을 하고 있긴 한데,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 수십이죠.”

리모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으로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소라는 정말로 자신의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얘기들을 그녀의 입이 아닌 타인에게서 듣는 것은 퍽 불유쾌한 일이었다. 리모는 무릎 사이에서 손깍지를 꼈다. 도운은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름이 뭐죠?

……권리모.”

“리모 씨, 당신이 소라를 구하는 일을 도와주면 좋겠어요.”

리모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도운을 마주보았다. 이해하기 어려운 배신감과 슬픔이 갈비뼈 안쪽을 채웠다. 그는 정말로 소라를 알고 싶었고 납득하고 싶었으며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리모는, 소라에게 무언가가 되고 싶었다.

 

 

 

5

 

 

 

 

소라는 눈을 떴다. 늦겨울의 공기에 뺨은 차갑게 식어있었다. 손을 뻗어 스탠드를 켰다. 나란히 놓인 다른 침대는 비어 있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엄습하는 불안감을 느꼈다. 침대에서 내려오자 얼음장 같은 바닥 타일이 발가락에 닿았다. 그녀는 서랍장을 열어 연발식 권총을 손에 쥐고 장전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거실로 나가자 희미한 빛줄기가 늘어져 있었다. 소라의 개인실 문이 열려 있고 거기서 형광등 불빛이 새어나왔다. 소라는 방문을 열고 그녀의 비밀의 방을 뒤지고 있는 소년의 뒤통수에 총구를 댔다.

“너, 도운을 만났지.”

리모가 뒤를 돌아보려 했지만 소라는 권총을 쥔 손에 힘을 주고 밀어 그에게 총의 촉감을 상기시켰다. 리모는 들고 있던 물건을 떨어뜨렸다. 소라의 가족앨범이다. 몇 번을 고민했으나 결국엔 버리지 못한 과거. 끊지 못한 끈. 그녀에게 고통만을 남겨주었으나 그만둘 수 없는 바람 때문에 칭칭 감겨 있는.

아버지는 소라가 할 수 없는 것만을 요구했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했어도 기준을 맞출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가 마지막에 요구했던 것은 대기업 차남과의 정략결혼이었다. 소라는 자신을 지키고 싶어서 도망쳤다.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싶어서 이 바닥을 완전히 떠나지 못하고 맴돌았다. 소라는 이 모든 변명들을 리모에게 털어놓고 싶은 충동을 삼켜낸다.

“나에게는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리모는 울먹이는 것처럼 대꾸한다. 아니, 화가 난 것처럼 말한다. 소라는 그의 비애와 분노가 어디에서 온 것인가를 짐작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휩싸고 도는 본능을 우선한다. 생존. 소라는 살아남기에 대해서 생각한다. 자기를 보호하는 것만을 생각하려 애쓴다.

“말할 필요가 있었나?

“나는 다 말했어요.”

돌이켜보면 리모는 만난 첫 날부터 자신의 상처를 숨긴 적이 없다. 과거를 모조리 뒤집어 내보였다. 영민한 소년의 떨리는 속눈썹을 내려다보면서, 소라는 할 수 있는 최선의 선의를 발휘하기로 했다. 그녀는 느리게 총을 내리고, 통보한다. 소년의 뒷목에 박혀있는 그믐달이 소라를 비웃는다.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사실 그녀는 종종 그 흉터가 꽤 예쁘다고 생각했었다. 이제 그런 사소한 이야깃거리들은 이 집 안에서 영영 수장될 테지만, 그래도 소라는 다시 한 번 더 그렇게 생각했다. 내 몸 어딘가에도 비슷한 모양의 점이 있을 것 같아서 구석구석을 뒤져본 밤도 있었다고.

 

 

 

6

 

 

 

 

리모는 도운이 준 명함에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전화를 받고 달려나온 그는 리모를 자신의 집으로 안내했다. 평범한 아파트에 위치한 가정집이었다. 리모는 도운과 그의 아내가 잠이 깬 쌍둥이들을 안고 어르는 광경을 멀뚱히 쳐다보았다. 다른 세상 같았다. 그가 단 한 번도 본 적도 없고 받아들여진 적도 없는 세상. 오로지 실온의 온도가 유지되는 삶.

“네가 도와준다면, 내일 소라를 구출할 계획이야.”

리모에게 따뜻한 코코아가 담긴 머그컵을 내민 도운은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리모는 낯선 공간에서의 적응되지 않는 피로감에 몽롱한 정신을 부여잡으려고 노력하며 코코아를 홀짝였다. 그는 도운의 지시대로 소라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오후 2시에 집으로 갈게요. 마지막으로 줄 게 있어요.」

 

“고마워. 네 덕분에 작전을 실행할 수 있게 됐어.”

도운은 친절하게 미소를 지으며 리모에게 감사를 표현했다. 목구멍이 덥혀지자 졸음이 찾아왔다. 리모는 소파에 파묻혀 꾸벅꾸벅 졸았다. 도운이 두꺼운 담요를 덮어주자 어쩔 도리 없이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리모는 허공을 낙하하는 듯한 꿈 속으로 빠져들었다.

 

“리모, 일어나.”

어깨를 흔드는 손에 눈을 뜨자 도운이었다. 한낮의 태양빛이 도운의 베란다 창을 통과해 찌르는 듯 비춰서, 리모는 눈을 비볐다.

“이제 준비해야 해.”

도운은 침착했지만 묘하게 흥분해 있었다. 어딘가 모르게 불안한 기색도 보였다. 잠이 덜 깬 리모는 상황을 제대로 인지할 틈도 없이 도운에게 이끌려 승용차에 탔다.

도운이 운전하는 차는 소라의 집으로 향하는 익숙한 길을 달렸다. 나른하게 반 쯤 감겨 있던 리모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소라의 집을 둘러싸고, 경찰차가 빼곡이 주차되어 있었다. 리모는 떨리는 음성을 제대로 내려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

“차 세워요.”

“리모.”

“차 세워봐요! 당신, 경찰이었어?

리모가 고함을 지르며 안전벨트를 풀려고 허둥대자 차를 세운 도운이 막았다. 리모는 있는 힘껏 그를 노려보았다. 도운의 얼굴에는 일말의 미안함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리모는 그가 자신의 정의를 위해서라면 거짓말조차 합리화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예감한다. 의심했어야 했다. 이를 악물고 그의 손을 떨쳐냈다. 안전벨트가 해제되고 리모의 몸이 튄다.

“잠깐만, 리모.”

도운이 강하게 팔을 붙들어 리모는 차 문을 나서다 말고 멈춰선다. 도운은 그에게 리볼버를 건넸다. 별다른 어려운 조작 없이 장전과 발사가 가능한 모델이다. 여전히 도운의 얼굴은 미동조차 없다. 그러나 리모는 그가 변덕처럼 내민 호의를 받고 달리기 시작했다.

 

 

 

7

 

 

 

 

소라는 격발음으로 먹먹한 귀를 문질렀다. 집안이 아주 엉망이었다. 경찰이 리모를 이용했을 거라고는 예측했지만 이 정도의 인원을 동원할 줄은 몰랐다. 분명 자신을 이용해 아버지의 꼬리를 잡으려는 속셈이다. 소라는 이를 갈았다. 정신을 집중하려 발을 구른다.

그 순간, 누군가가 뒤쪽 창문을 깨고 뛰어들었다. 소라는 반사적으로 그에게 총을 겨눴다. 몸을 버둥거리며 유리조각을 털어내던 그는 고개를 들어 소라를 보았다. 리모였다. 소년은 소라에게 기어가려다 널부러져 피를 흘리는 경찰 한 명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그는 소라가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본 적 없다. 그 사실에 소라는 작은 두려움을 느낀다.

소라는 리모에게로 다가가 총을 그의 이마에 겨눴다. 그는 잠시 망연한 눈빛을 한다. 그녀는 리모가 늘 닿지 않는 영역에 손을 뻗으려고 했다고 느낀다. 리모가 천천히 팔을 올려 리볼버를 장전해 두 손으로 받쳤다. 소라는 엄숙한 기분으로 방아쇠에 올린 손가락을 까딱일 준비를 한다. 복잡한 기분이다. 리모를 처음 만난 날, 소라는 지금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를 들였다. 그러나 이제 그를 보고 있으면 가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녀의 안에서, 또 그의 안에서 오염된 줄로만 알았던 개념.

총성이 울린다. 리모의 것이다. 소라는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에 쓰러진 경찰을 본다. 리모의 리볼버에서 화약 냄새가 풍겼다.

“나, 잘 할 수 있다고 했잖아요.”

소년은 눈을 휘며 천진하게 웃는다. 그리고 아직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여자의 앞머리를 쓸어넘긴다. 총알이 스쳤는지 반듯한 이마가 찢어져 붉은 피가 흘렀다. 리모는 잠시 망설이다가, 흉이 질 것이 분명한 소라의 벌어진 상처에 입맞춘다.

끝이 떨어진 야광별이 천장에서 달랑거리다, 나비처럼 땅으로 내려앉았다. 동시에 소라는 리모를 힘주어 껴안았다.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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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ME : 이채언루트 - Uneasy Romance



 처마 안으로 들어오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모처럼 꺼내 입은 여름 정장에 묻은 빗방울을 털며 혀를 찼다. 그렇게 굵은 빗줄기도, 오랜 시간 맞은 것도 아니었는데 구두 밑창이 젖어 발자국이 남았다. 나는 씁쓸함에 고개를 떨구고 새카맣게 물이 드는 회색 돌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벌써 피로연이 시작된 듯, 멀리서 왁자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도운은 끝까지 즐기고 가라고 붙잡았지만 나는 일이 있다는 적당한 핑계를 대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빠져나왔다. 돌아가는 버스를 타려 식장을 나섰다가, 떨어지는 빗방울을 피해 황급히 건물로 돌아온 것이다. 사실 처음부터 중간에 빠져나올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도운은 내가 세상에 자랑할 만한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이다. 그런 친구의 결혼을 축하해주고 싶지 않을 리가.
 단지, 홀로 서서 그 모든 의식들을 지켜 보기가 너무 힘이 들었을 뿐이다. 마주 보고 안부를 묻고 이야기를 나누고 웃고 눈을 맞추고 가끔은 서로의 손을 잡기도 하는 사람들 틈에서, 세상에 의미있는 건 단 둘밖에 없는 것 같은 눈빛을 한 도운과 소영 씨를 보는 것이.
 참 이상하지. 눈부신 조명과 기쁜 음악과 평생 아끼고 사랑하겠습니까, 하는 주례사와 신랑 신부의 행진이 이어질수록 왜 유독 짙어진 내 그림자의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질까. 왜 나는 춥고 외로워져 눈을 내려깔고 이 자리에서 증발하듯 사라져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할까. 그렇게 한 시간 남짓을 나는 섬처럼 앉아 있었다.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소리를 부서지는 파도소리로 여기면서.

 어른이라는 건 곤란해. 벅차다는 이유로 도망치기가 어렵잖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다. 노력했지만 잘 안 됐다. 같은 생각이나 바람이나 언어를 가진 누군가를 찾아내는 것이 드물다는 사실을 깨달은지는 좀 되었다. 그렇게 찾아낸 사람 또한 나와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는 진실도. 떼를 써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도운의 결혼을 상상해본 적 없는 것은 아니다. 도운은 나와는 다른 부류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그의 행복을 관조하는 연습을 해 보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외로웠다. 그래, 외로웠다.
 나는 싸아, 소리를 내며 치는 빗발을 응시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어색한 입을 떼어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너무 많이는 오지 말아. 좋은 날인데. 도운이랑 소영 씨가 슬퍼할거야.

 "궁상떨고 있네."

 화들짝 놀라 돌아보니 새초롬한 눈빛과 마주쳤다. 딱 봐도 값나가 보이는 연보라색 원피스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특별한 날이라고, 클러치백을 든 손에는 네일아트까지 한 채였다. 심장이, 습기 찬 땅으로 내려앉았다.

 왕소라.
 소라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애써 잔뜩 무장한 표정이 흐트러지려 했기 때문에. 안 돼.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한 번 했다. 왕소라는 무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이를 악물고 태연하게 멀쩡한 척을 하며 말했다.

 "왔었어? 네 얼굴 못 봤는데."
 "방금."
 "왜 벌써 나왔어. 더 있다 가지."
 "너야말로 도망가다 비 맞은 거 아니야?"

 하하. 단단한 창 같은 것에 꿰뚫린 기분에 기침처럼 또 웃음이 터져나왔다. 재수없는 건 여전했다. 말로는 그 애를 이긴 적이 없어서 나는 눈을 돌렸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왕소라도 더 말이 없었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비가 내리는 밖을 바라보았다. 얼마만에 만난 거지, 싶어 입속으로 숫자를 셌다. 육 년, 칠 년...... 그러고보니 우리 둘 다 오랜만이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유가 우리가 익숙한 밤낮을 함께했던 고작 몇 년 때문이라는 걸 알아차리자, 빗물이 갈비뼈 안쪽을 두드리는 것 같아서, 나는 가슴에 손을 짚었다. 왕소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뱉었다.

 "택시 불렀어. 같이 타고 가던가."

 가슴에 댄 손 아래로 맥박이 느껴졌다. 왕소라는 이래서 불편하다. 이 녀석 앞에서 나는 너무나도 쉽게 휘둘려버린다. 바보 같은 짓인걸 알면서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낯선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드는 것보다는 걔가 나았다.

 택시는 금방 도착했다. 뒷좌석에 몸을 밀어넣었는데, 당연히 보조석에 탈 줄 알았던 왕소라가 내 옆으로 들어와 차문을 닫았다. 출발해주세요. 내가 멍하니 그 애를 쳐다보는 사이에 평온한 목소리로 소라는 말했다. 택시는 벌써 고인 물웅덩이를 가르며 부드럽게 움직였다.

 택시 안은 라디오도 틀어져 있지 않아 적막했다. 나는 왕소라를 곁눈질했다. 그 애는 정말 나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이 자기 쪽의 창턱에 팔을 기대고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나는 입을 비죽이다가 한숨을 작게 내쉬고 긴장을 풀려 노력했다. 시트에 머리를 기대니 힘이 쭉 풀렸다. 아닌 척 해도 내내 피곤했던 것일 터다. 문득 목적지를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지만,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몸을 늘어뜨렸다. 창문을 타고 흐르는 빗소리에 자연스럽게 눈이 감겼다.

 "차도운 생각 하고 있지."

 그 말에 눈을 뜨자 왕소라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우리 사이의, 한 사람은 너끈히 앉을 수 있는 자리에 한 손을 대고 어깨를 숙여 내게 다가온 걔는 뭐든 다 안다는 그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의문문이 아닌 평서문이었다. 나를 비웃어 버리려는 듯, 입술 한 쪽이 비틀려 올라가 있었다. 또다시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이번에는 씁쓸하지만 새카맣지는 않은, 그러니까 연민의 웃음이었다. 바보야, 차도운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바로 너잖아. 그래서

 나는 그냥 고개를 기울여 그 애에게 키스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나는 우리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의 나는 사람들은 각자의 들쑥날쑥한 내면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퍼즐 조각과도 같은 그것은 다른 이의 것과 들어맞기도 하고 부딪혀 어긋나기도 한다고. 나는 왕소라와 나의 공통점은 도운과 연결되어야만 안정적인 모양새를 갖출 수 있다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도운이 우리의 삶의 궤적을 벗어나는 날들이 늘어나던 즈음에, 나는 소라와 함께 있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나와 그 애의 못나고 복잡한 톱니바퀴의 틈들을 닮았다고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천천히 서로의 요철을 맞추었다. 작은 더듬이로 세상을 보는 눈먼 벌레들처럼. 가진 것은 시간뿐이라는 듯이 젊은 날들을 아무렇게나 보내가며. 우리는 서로를 향해 다정한 말이나 상냥한 손길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함께 있었다. 소라는 어땠을지 몰라도 그 시절의 나는 불현듯 그녀를 맹렬히 생각하고는 했었다. 그녀의 누구와도 겹쳐지지 않는 마음과 자석의 반대극처럼 타인을 밀어내는 척력에 대하여.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 서있다가도 그런 것들을 떠올리면 몸이 떨리고는 했다. 로맨스라고 이름을 붙이기는 어려워도ㅡ

 내가
 너를
 사랑했었지

 ㅡ사랑이란 것을 했었다.

 왕소라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아서 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뺨에 대었다. 젖어 있지 않다는 것이 그녀다워서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고 건조한 살결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그 애의 입술이 달싹거리더니 숨결이 느껴졌다. 나뭇잎만큼 여린 숨이었다. 그 순간, 각진 나의 모서리들이 흐물거리며 무너졌다.

 이유도 기억나지 않는 큰 싸움을 하고 우리는 헤어졌다. 그 순간의 기억이 너무나도 힘겨워 나는 계절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그 어떤 수열보다도 너무나도, 너무나도 어려웠던 한 철이었다. 누군가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 그토록 고통스러울 줄이야. 누군가와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그토록 절망스러울 줄이야.

 지금이야 그런 감정들은 흐르는 무수한 낮과 밤들에 무뎌져 날카롭게 나를 찌르지 않지. 우리는 이제 어리지 않고 각자의 사정을 계산하며 눈치나 보는 어른들이지. 그래도 우리에게 그런 시절이 있었어, 소라. 신기하지 않아? 우리가 사랑을 했었어.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려 했었어.

 왕소라가 먼저 입술을 뗐다. 그녀는 곧바로 후회하는 듯이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작게 고개를 저어보이고는 나즈막히 중얼거렸다. 기사님, 여기서 세워주세요. 택시 기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여기서요? 네. 비가 이렇게 오는데...... 괜찮아요.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물보라를 일으키며 도로 한가운데서 택시가 멈췄다. 나는 문고리를 잡으며 왕소라에게 힘껏 웃어 보였다. 그녀는 내 눈을 보지 않았다. 나는 손을 건네듯이 말들을 뚝뚝 던졌다.

 "많이 말랐다. 밥 잘 챙겨 먹어."
 "......남말 하네."
 "나랑 만난 거 마음 쓰지 말고."
 "내가 그럴 것 같냐."
 "갈게."

 그 말을 뒤로 하고 차 문을 열어 빗속으로 발을 디뎠다. 차가운 비가 매섭게 온 몸을 때렸다. 권리모, 라고 그 애가 부르는 것도 같았고 나는 서둘러 문을 닫았다. 한 발짝 물러서자 택시가 느리게 앞으로 나아갔다. 검은 선팅이 되어 있는 안쪽은 어두컴컴하니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왕소라가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을 거라고 짐작했다. 나는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택시가 서서히 멀어져가서 작은 점이 될 때까지, 흠뻑 젖은 팔을 좌우로 흔들었다. 내 모든 마음을 담아

 사랑하는 시절이 있었다는 이유로 살아가는 삶도 있지 않을까. 그 때의 감각들을 되새기며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사랑했어, 소라. 너도, 그 날들도. 그 짧은 시간들이 나의 모든 피와 살과 뼈를 구성해 나를 지탱해 준 것 같은 기분이야. 모든 것이 좋았어. 내게는 전부 완벽했어. 그러니까 이걸로 됐어. 너를 만나서 다행이야.

 우리는, 괜찮을거야. 다른 사람과 다시는 연대하지 못한다고 해도. 어떤 누군가를 찾아내지만 결국에는 어긋나버린다고 해도. 우리는 우리가 되자. 그렇게 마음으로 소리치니 외롭지가 않았다. 더는 외롭지가 않았다.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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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로봇에 나오는 봉숭흉화심 책입니다.
느와르 AU이고, 분위기가 어둡습니다. 조직 후계자 봉숭과 그녀의 심복 흉, 마약딜러 화심이 나옵니다. 심의를 넘지 않는 약간의 폭력, 약물 묘사가 있습니다.
중철제본/16P/2000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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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로봇에 내는 림솔 재록본입니다.
권리모의 일기 형식으로, <산하엽>, <Words of understanding>, <위태로움을 위하여>를 손본 세 편과 미공개 단편 세 편이 수록됩니다.
중철제본/20P/2000원

샘플은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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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종류의 사실은 모르기 어렵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존재였다. 좋고 높은 의미로. 사람들 위에 설 수 있다는 건 명백하게 특권이다. 나는 그걸 웃으며 받아들였다. 쉬운 삶이었다. 미움받지 않는 법에는 꽤 능했으니까. 보통은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의 누군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면 한 걸음 물러서기 마련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그랬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줄 특별한 사람들을 고를 수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고 열망하며 동경하게 할 수 있었다. 이것에 나는 어떤 악의도 담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었으니 했다. 오히려 모두가 행복한 일이었다. 리모도 소라도 나를 사랑했고 나도 그 둘을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은 적 없다. 그건 나도 진심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실수를 저질렀다. 그걸 실수라고 명명하는 것이 과연 적당한 처사인지, 또는 도덕적으로 옳은지 나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나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소라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으며 무엇이 그녀를 괴롭게 하는지. 그래. 나는 알았다. 그 애가 자주 눈을 내리깔고 손톱을 뜯는다는 것을. 그럴 때마다 강렬한 두려움이 그 눈가에 내려앉는다는 것을.

단 한번의 손길이나 몇 마디의 말로 내가 모든 것을 바꿔버릴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소라는 사라졌다. 그게 실수였는지 오만이었는지 아니면 방관이었는지를 정의하려 들면 아직도 눈 앞이 어지럽기에 실수라는 단어로 흐지부지 마음을 가린다. 그건 실수였다.

그리고 리모. 그 사건은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의욕도 품지 못했다. 나 또한 같은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고 무너지는 그에게 손을 내밀거나 위로를 건넬 상황이 못 되었다. 시간이 흘러서야 그를 달래고 방향을 안내해 줄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내 말대로 했다. 죗값을 치르고 나에게로 돌아왔다.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나날이었고 나는 내가 삶의 장면들을 통제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지금에서야 나는 고백한다. 그 모든 것이 다른 것이 아닌 기만이었음을. 네가 쉰 목소리로 날 저주하며 내 손을 놓는 이 비극의 끝에서야 절절하게 깨닫는다. 너는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꿰뚫어 보았다. 나는 틀렸고 비겁하다. 안일했고 멍청했다. 있는 힘을 다해 어린 너를 붙드는 어린 나를 상상해 본다. 그랬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겠지. 그러나 나는 지금의 나고 너는 지금의 너다. 눈물이 흐른다. 후회라는 감정은 생소하며 끔찍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력하다. 공허한 외침.

소라야.

나는 이 파국을 구원할 수 없다. 네가 추락한다.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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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나서 처음으로 억울함을 느꼈던 적이 언제였더라.
 
 나는 잊지 않았던 기억들을 입속에서 읊조렸다. 망설이지도 않고 그것들은 튀어나왔다. 태초의 기억이 흐릿했다. 맞아, 나는 차별되고 구별되기 위해서 세상에 나온 몸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혀가 짓씹혔다. 빌어먹을. 어느새 불쾌한 기억들은 밀려나고 욕지거리가 입 안 가득 자리를 차지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래, 나는 자궁 밖으로 끄집어낼 때부터 남달랐고 그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남들과 달랐다.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 철들 무렵부터 안에서는 껍질을 벗고 밖에서는 적을 만들었다. 내 몸 안에는 터질 듯한 열기가 가득했고 그걸 본 사람들은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그것 또한 억울한 건 매한가지였어도 가만히 앉아 수를 놓으며 열을 삭히는 억울함보다야 나았다. 나의 역사는 곧 속박과 굴레의, 납작 엎드려야 하는 이가 고개를 드려는 투쟁의 역사였다. 抑鬱. 누를 억과 막을 울이라니. 내 인생을 이토록 잘 대변해 주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신이 되고 싶다고 결정했을 때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꿔 말하면 나는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잃을 것도 떨어질 곳도 없이 강하다고. 더 이상 눌릴 수도 막힐 수도 없다고.
 
 “흉.”
 
 나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씹어뱉었다. 흥분으로 거칠어진 숨이 발음 사이로 뒤섞였다. 그녀는 태연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아씨. 화답하는 목소리는 참으로 건방지게도, 당황한 기색도 떠는 모양새도 보이지 않았다. 당장, 그거, 내려놓게. 말보다는 신음에 가까운 발음들이 간신히 문장을 이루었다. 보랏빛 입술이 호선을 그었지만, 오른쪽 관자놀이에 차갑게 닿은 총신을 붙든 그녀의 손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려 안간힘을 썼다. 아씨. 흉은 나를 한 번 더 부른 후,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아씨의 안위를 위해섭니다. 저 하나만 희생하면 돼요.”
 
 눈을 질끈 감고 미친 듯이 고개를 내리저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명백하게 나를 방해하려는 세력 중 하나의 짓이다. 그녀가 누구에게 어떤 협박을 들었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나는 맹세코 그들을 찾아내서 내게 애원할 때까지 경을 치고 죽여버릴 것이니, 그녀는 나를 위해서라는 같잖은 변명을 하며 이런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도리질은 계속되었고 가지런하던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흉은 미묘한 표정을 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내 머리카락을 빗어주던 사람이었다. 그걸 떠올리자 명치께가 타들어갔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씨. 잘 들으세요. 이젠 제가 없어도 혼자 해내셔야 합니다.”
 “닥치거라. 나불대지 마라.”
 “접근해 올 자칭 충신들을 믿지 마세요. 약한 모습도 보이지 마세요. 벼랑 끝에 서도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세요.”
 “허튼 짓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게야. 너의 팔을 부러뜨리고 혀를 뽑을 것이야.”
 
 서로를 앞에 두고도 대화는 엇갈렸다. 악문 이가 갈렸다. 차마 발을 구를 수는 없었다. 내가 다가가려는 시늉이라도 하면 흉의 손가락이 쇠를 잡아당길 것만 같았다. 내 얼굴이 난생 처음의 꼴로 일그러지자 흉이 시선을 떨구었다. 굳게 힘을 주었던 턱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나는 분노했다. 흉. 으르렁거리다시피 엉망인 부름을 듣고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눈빛이 확고했다. 그건 충견에게서나 볼 법한 눈이었다. 흉에게 어울리지도 않았다. 궁에서 가장 못났던 시종, 거둬주셔서 감사합니다. 간신히 들릴 정도로 그녀는 속삭였다. 나는 거의 숨을 쉬지도 못할 만큼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씨, 최고가 되세요.”
 
 뼈를 부수는 격발음에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녀의 몸이 힘을 잃고 허깨비처럼 풀썩 쓰러지는 것은 찰나였다. 잠을 자듯 누운 등 밑으로 끈적끈적하고 적나라한 액체가 꿈틀꿈틀 바닥으로 퍼졌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손마저 땅에 닿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짐승처럼 그녀의 껍데기로 기어갔다.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잡자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네 년은 은혜를 이렇게 갚느냐!”
 
 양쪽 뺨을 타고 갈퀴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목이 메어 갈라지는 목소리로 절규했다. 네 이년, 감히 주인의 명을 어기다니. 네가 나를 거역하느냐. 큰 벌을 받아야 할 것이야.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나는 그녀를 거칠게 잡아안고 흔들었다. 내가 선물했던 귀걸이가 흔드는 대로 속절없이 흔들렸다. 정확히 이유도 모른 채 나는 미칠 듯이 억울했다. 삶이 내게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린 아이처럼 악을 쓰고 그녀의 품을 파고들어 얼굴을 묻었다.
 흉. 나의 시종이자 친구. 나의 심복. 나의 기반. 나의 허물이 찢겨나간다. 내 몸처럼 나를 감쌌던 존재가 강제로 분리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아마 죽거나 살아남아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산다 한들 그 생에 의미는 있는가.
 흉의 몸은 아직 따뜻했다. 우리가 어렸을 적, 견딜 수 없이 추웠던 겨울에, 억지를 써 끌어들여 한 이불 속에서 느꼈던 어느 날의 체온과 변함없이.
 
 
 
 
-
 
첫 봉숭흉을 이런 걸로 쓰다니,,,, 흑흑
그만큼 마지막이 너무 강렬했습니다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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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봇온에 내는 림솔 위주 동림솔 책입니다.
동림솔이 함께 대도공대로 진학해서 동거합니다.
떡제본/40P/5000원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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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다. 침대 옆에 발갛게 빛나는 전자시계를 보니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새벽이었다. 보통 이런 시간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좋은 것이 없다.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키는 사이 초인종 소리는 점점 빨라져 열 번도 더 날카롭게 울렸다. 대체 어떤 미친 놈이야. 가디건을 걸치고 안경을 찾아 쓰는 찰나, 불청객은 뭐가 그리 급한지 문까지 거칠게 두드려대고 있었다. 쿵쿵쿵쿵쿵. 그 소리에 맞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쯤 되니 무슨 심각한 일이 생겼나 싶어 마음이 급해져서,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나는 대문을 열어재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어떤 계시에 가까운 느낌이었던 것 같다. 흔들리는 먹구름을 찢는 빛나는 회색 번개와도 같은, 강렬한 확신. 가슴이 아프기까지 한 불안감.

 차갑고 눅눅하고 습한 공기가 피부에 먼저 와닿았다. 냉기에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얼어붙고 말았다. 잠은 모두 달아나버렸다.

 비에 흠뻑 젖은 왕소라가 서 있었다.


 “넌 다 알고 있었지.”

 “......”


 왕소라의 짧고 검은 머리카락이 온통 축축해져 창백한 뺨 위로 달라붙어 있었다. 현실감을 잃어버려 굳은 내 입보다 그녀의 입이 먼저 열렸다. 그리고 그녀의 그 말을 듣자, 나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앞뒤를 잘라먹은 말이었어도 나는 이해했다.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곧 절망에 휩싸였다.


 소라는, 알아버렸구나.


 그랬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에게만은 말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간절히 바랐다. 기도하며 살아온 삶도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신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기를 바랐다.

 왕소라가 그냥 이대로 남은 시간을 살아가기를. 그녀의 예민하고 또렷한 눈이 실핏줄로 붉게 물들지 않기를. 그 희고 가는 손가락들이 고통에 떨지 않기를. 영영 무한한 시간 동안 아무 것도 모르기를.


 내 그런 행동들이 소용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부디.


 순식간에 손바닥이 날아왔다. 눈에 보일 만큼 심하게 떨고 있는 젖은 손에는 힘도 없었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힘겨워 나는 맞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왼쪽 뺨이 차가웠다. 와중에도 태연하게, 왕소라, 비 계속 맞으면 감기 들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안으로 들일까 싶어 한 발짝 물러서자,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그녀가 내뱉었다.


 “권리모, 넌 정말 개자식이야.”


 나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녀는 무표정했다. 내가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고만 있자 가늘고 파란 목울대가 꿈틀댔다. 죽음을 앞둔 벌레처럼. 나는 시체처럼 차가울 그녀의 목덜미를 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우리의 친우, 도운의 결혼.

 기뻐해야 할 그 소식이 서운해질 때마다, 그는 그만한 행복을 가질 자격이 있어, 라고 되뇌이곤 했다. 그는 빛 속의 인간이야. 나와 왕소라와 셋이서 어울릴 수 있던 시간이 기적과도 같은 이상한 일이었던 거지. 우리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아. 도운은 우리와는 다른 인간이야.

 아내와 함께 있는 도운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 풍경이 그가 응당 있어야 할 곳이었다. 완벽하고 완전했다. 눈이 시릴만큼 눈부셨다.


 나는 알고 있었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왕소라의 눈먼 동경을 동정했다. 가망 없는 사랑을 하는 그녀의 바람을 지키고 싶었다. 아마 자기연민과 같은 맥락이겠지.

 도운을 바라보는 왕소라의 눈이 빛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나는 달군 돌조각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희망에 사로잡혔다가 절망으로 내동댕이쳐지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희망에 취하지도 못할 것이다. 전부 끝났다. 어차피 도운이 시작했던 관계였다. 도운이 없었다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감정들. 애정들. 미련의 찌꺼기들. 도운이 없다면 더 이상 의미도 이유도 없는 추억의 잔예들.


 "감기 걸려...... 일단 들어와."


 내가 대신 목에 메었다.

 그녀는 의연하려 애썼다. 늘 그랬듯이, 자신의 꿈이 좌절될 때마다의 버릇처럼, 손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것이다. 빌어먹을 감정의 물살이 그녀를 꺾지 못하도록. 손을 잡아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는 도운이 아니니까.

 나는 권리모. 빛 속에 있는 도운만을 응시하는 어둠 속의 왕소라를 사랑하는 권리모. 왕소라가 나를 보게 만들 만큼 빛 속에 있지도, 차라리 내게 안기라고 소리칠 만큼 어둠에 속하지도 않은 멍청하고 무능하고 이기적인 권리모. 나는 도운에게 왕소라의 진심을 말하지 않았다. 또한 왕소라에게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왕소라의 본질은 고통이다. 절망이고 괴로움이다. 나는 그걸 알았고, 또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무너뜨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녀의 위태로움을 갈망하면서도 더 이상 그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를 생각할 때면 항상 드라이아이스가 떠올랐다. 영점 아래의 온도. 주위에 존재하는 사람 모두의 숨통을 틀어막고, 남김없이 전부 소진되는 아름다움.

 왕소라는 불행해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이야. 절벽으로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다고. 그녀 주변에 머무르면 같이 불행해질거야. 나는 안 돼. 그녀를 구할 수 없을 뿐더러 지탱할 수 조차 없어. 도운이었다면 모르는 일이겠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못 해.


 "돌아갈게."


 내 길고 긴 머릿속 혼잣말의 틈을 비집고,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차 싶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절대 쏟아지지 않을 눈물이 가득 괸 완벽한 그녀의 옆얼굴을 응시하면서, 나는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버렸다.

 왕소라는 내 모든 생각을 읽은 눈빛이었다. 그 이후에 내가 들었던 것이 그녀가 입 밖으로 낸 것인지, 나만이 들은 환청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도운도, 너도 나를 구원할 수 없어. 애초에 기대한 적도 없어. 오만하게 굴지 마. 내게 베푼다는 듯 행동하지 마. 내가 불행으로 죽어버린다 해도 그건 내 몫이야.


 왕소라는 왔던 것처럼 빗속을 걸어갔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그녀를 산산조각 내버릴 것 같았다. 마르고 희미한 그림자가 물안개에 가려 사라질 때까지 나는 허공을 응시했다.


 넌 젖을수록 투명해지는 꽃. 찢길수록 단단해지는 날개. 목이 졸릴수록 빛이 나는 별.

 왕소라, 제발. 제발 그만 아름답길.


 넌 추락하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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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오랜만에 완성한 연성......

마라만님 동림솔 연성에 뽕차서 예전부터 쓰던거 부랴부랴 끝을 봤다

샤이니 종현 산하엽 들으세여 여러분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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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야, 너 미쳤어?"

권리모의 날선 목소리가 쟁쟁히 빈 교실을 울렸다. 내가 침묵했기에, 뒤를 잇는 것은 권리모의 거친 숨소리 뿐이었다. 권리모가 화를 낼 것은 진작에 예상했었다.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함께 로봇을 만들 때만은 연신 웃어주던 놈이었으니까. 서로를 욕하고 무시하면서도 착실하게 정을 쌓던 녀석이었으니까.

"차도운, 너도 뭐라고 좀 해 봐. 왕소라가 드디어 미친 게 틀림없어. 그만두겠다잖아!"

그리고 그 외침에 자연스럽게 권리모와 나의 시선은 동시에 도운에게로 향했다. 이제 그만두겠다는 나의 선언을 들은 후부터 도운은 내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곁눈질로 살핀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권리모의 분노에 찬 혼잣말과 나의 계속되는 침묵에, 도운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평소처럼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는 소라를 믿어. 소라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도운치고는 의외의 행동이어서 나는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권리모처럼 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나를 붙잡을 줄 알았는데. 몇 번이나 그랬듯이, 나를 붙잡고 설득할 줄 알았는데.
하, 하고 권리모가 어이없다는 한숨을 쉬던 것이 기억난다. 도운은 그것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권리모가 격앙되어 나와 도운에게 몇 마디를 더 쏘아붙였지만, 나도 도운도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버리는 것은 나인데도, 버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도운은 일이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조용히 체념하고 대상을 이해하려 애쓰는 성격이었다. 화를 내는 것은 권리모의 역할. 경멸하는 것은 나의 역할. 그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예상된 결과였다. 그가 말했듯이 그는 나를 믿었으니, 떠나는 내게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내게는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적당한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에게서 묘한 배신감마저 느꼈다. 배신이라니, 오히려 그들이 내게 붙여야 할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지만 그랬다. 나는 차도운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당혹스러울 만큼이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등을 돌려 교실을 걸어나왔다. 권리모는 내게 끝까지 고함을 질렀다.
그들을 두고 돌아서서 교실을 나오는 나의 뒷모습은 어땠을까. 셋이 함께한, 거의 완성된 프로젝트의 결말을 짓지 않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차갑고 매정한 왕소라로 기억되었을까.
그러나 사실 나는 뒷문을 열면서도 오히려 도운이 나를 등지고 있는 것만 같아서 돌아보지 못했다. 내게서 등을 돌린 도운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상상돼서, 나는 떨며 눈물을 참았던 것 같다. 굴욕과 서운함. 그리고 마음 속으로 되뇌었던 애원들. 나의 벼랑 끝에서 현실에 발을 내딛으며 곱씹었던 흐느낌들.

안 돼, 도운. 날 버리지 마.
나를 이렇게 버리지는 마.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 날로부터 시간이 흘러 멀리 떨어진 지금, 네 얼굴을 보며 그 기억을 떠올린다. 이상하게도 그런 기억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네가 떨어지기 직전의 나를 찾아낸 이런 순간에는 더더욱.
버려진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그 때 네가 나를 붙잡아주길 바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서야. 네가 나를 잡았어도 과연 내가 아버지의 집착과 가문의 굴레에서 도망칠 수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과가 어찌 되었든.

그리고, 이제 너도 내게 버려졌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도운. 너는 나를 사랑하니까. 내가 너를 붙잡기를 바라니까. 한 번만 나를 용서해 달라고, 나와 함께해 달라고 하기를 바라니까.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너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나는 나의 고통을, 또 너의 고통을 덜기 위해 악을 쓴다. 악당이 된다. 날 너랑 같은 레벨로 취급하지 마.

하지만 너는 여전히 울 것 같은 표정이다. 버려지는 이의 눈빛이다. 나를 내려다보는 너의 눈빛이 너무나도 간절해서, 나는 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추락 직전에조차 눈을 감지 않는다. 버리고 싶은 건 네가 아니었는데. 원망해야 하는 것도 네가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너는 죽는 날까지 나를 원망하겠지.

사실 나도 그래, 도운. 떨어지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나인데도, 이상해. 모르겠어. 버려지는 것 같아. 허공을 가르는 아찔한 감각에도 덮이지 않는, 이 상실감이라니. 이제는 정말 끝이라고 믿었는데. 모두 포기했다고 다짐했는데.

아마도. 나는 너를 사랑했겠지. 네가 나를 구원해 주기를 바랐겠지. 우리는 아무도 누군가를 구할 수 없는데도. 우리는 결국 서로에 의해 버려질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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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이야기 중 쓰고 싶었던 것을 마침 전력 주제가 좋길래.... 무임승차....(노답

장필순 - 그대로 있어주면 돼, Tom Odell - Long way down만 들으면서 썼당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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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는 팔목을 붙잡아 억지로 의자에 앉혔다. 아무도 없는 점심시간의 보건실에 적막이 감돌았다. 서랍을 뒤져 연고를 찾아내, 핏기가 가시지 않은 뺨 위의 상처에 발랐다. 그녀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가만히 있어. 나를 뿌리치려는 팔을 붙들고, 반창고의 포장을 뜯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분노가 가득한 눈으로 허공을 쏘아볼 뿐.

 반창고를 그녀의 상처에 붙이며 나는 중얼거렸다. 왜 싸움도 못하는 왕씨 집안 아가씨가 그런 일진 무리들에게 덤벼들었담. 전교 석차 1,2등을 다툴 만큼 머리가 좋으면서 말이야.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내 손을 잡아챘다. 검고 깊은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 날카로운 시선을 받아내기가 힘겨웠다.

 그녀는 빠르게 말들을 토해냈다. 숨도 쉬지 않고.


 "나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할 거라고 했어."

 "......"

 "매일 냄새나는 쇳덩어리나 만지면서, 평생 혼자일 거라고 했어."


 나와 한참 눈을 마주치고는 떨던 그녀는 먼저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무언가 변명을 하려는 것처럼 다시 입술을 떼었다가, 그만두었다.


 "죽여버리지 그랬어."


 나는 진심이었다. 그녀는 아주 작게 움찔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 말을 못 들은 것처럼. 못 듣고 싶어하는 것처럼. 나는 더 힘주어 말했다.


 "다음에는 꼭,"


 박살을 내 버려, 와 목을 졸라 버려, 사이에서 고민하는 찰나, 그녀가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녀의 몸부림에 얄팍한 의자는 뒤로 밀려 나가떨어졌다. 왕소라가 내 팔과 어깨를 잡았다. 이를 악무는 자존심도 소용 없었다. 절규에 가까운 흐느낌이, 내 귀 바로 옆에서 맴돌았다. 그녀의 숨소리가 내 몸을 찢어발기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를 단단히 붙들었다. 더 이상 무너지지 마, 왕소라.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그 다음에 위로의 몇 마디, 기억나지 않지만.

 하지만 마지막으로 했던 말들은 똑똑히 기억한다. 그 말을 들은 그녀가 울음을 그쳤던 것도. 그래, 그 순간 그녀는 내가 얼마나 그녀를 이해하고 있는지 깨달았던 것이다. 저주받은 이해의 말들.

 분명히 그 말들이 그녀를 다시 일어서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추락시켰겠지.


 소라. 너를, 우리를 무시하는 자식들은 다 죽여버려. 우리를 사랑하지 않을 거면 두려워하게 만들어. 


 그 때 내가 그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었나.


 네가 죽고 나서 나는 얼마나 죄책감 속에서 살아왔는가. 또 너를 비난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얼마나 너를 절실하게 이해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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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림솔만 쓰고 싶다

가장 닮았으면서도 결말이 다른 악당들의 이야기.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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