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트로봇에 내는 림솔 재록본입니다.
권리모의 일기 형식으로, <산하엽>, <Words of understanding>, <위태로움을 위하여>를 손본 세 편과 미공개 단편 세 편이 수록됩니다.
중철제본/20P/2000원

샘플은 이어지는 페이지가 아닙니다.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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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 종류의 사실은 모르기 어렵다.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존재였다. 좋고 높은 의미로. 사람들 위에 설 수 있다는 건 명백하게 특권이다. 나는 그걸 웃으며 받아들였다. 쉬운 삶이었다. 미움받지 않는 법에는 꽤 능했으니까. 보통은 자신이 닿을 수 없는 곳의 누군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면 한 걸음 물러서기 마련이었다. 거의 대부분이 그랬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해 줄 특별한 사람들을 고를 수 있었다. 그들이 나를 바라보고 열망하며 동경하게 할 수 있었다. 이것에 나는 어떤 악의도 담지 않았다. 그저 할 수 있었으니 했다. 오히려 모두가 행복한 일이었다. 리모도 소라도 나를 사랑했고 나도 그 둘을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은 적 없다. 그건 나도 진심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실수를 저질렀다. 그걸 실수라고 명명하는 것이 과연 적당한 처사인지, 또는 도덕적으로 옳은지 나는 아직까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히 나는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소라가 무엇을 고민하고 있으며 무엇이 그녀를 괴롭게 하는지. 그래. 나는 알았다. 그 애가 자주 눈을 내리깔고 손톱을 뜯는다는 것을. 그럴 때마다 강렬한 두려움이 그 눈가에 내려앉는다는 것을.

단 한번의 손길이나 몇 마디의 말로 내가 모든 것을 바꿔버릴 수 있다는 것도.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소라는 사라졌다. 그게 실수였는지 오만이었는지 아니면 방관이었는지를 정의하려 들면 아직도 눈 앞이 어지럽기에 실수라는 단어로 흐지부지 마음을 가린다. 그건 실수였다.

그리고 리모. 그 사건은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의욕도 품지 못했다. 나 또한 같은 사고로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고 무너지는 그에게 손을 내밀거나 위로를 건넬 상황이 못 되었다. 시간이 흘러서야 그를 달래고 방향을 안내해 줄 수 있었다. 다행히도 그는 내 말대로 했다. 죗값을 치르고 나에게로 돌아왔다. 안도의 한숨이 나오는 나날이었고 나는 내가 삶의 장면들을 통제할 수 있음에 감사했다.

지금에서야 나는 고백한다. 그 모든 것이 다른 것이 아닌 기만이었음을. 네가 쉰 목소리로 날 저주하며 내 손을 놓는 이 비극의 끝에서야 절절하게 깨닫는다. 너는 죽음의 문턱에서 나를 꿰뚫어 보았다. 나는 틀렸고 비겁하다. 안일했고 멍청했다. 있는 힘을 다해 어린 너를 붙드는 어린 나를 상상해 본다. 그랬다면 많은 것이 달라졌겠지. 그러나 나는 지금의 나고 너는 지금의 너다. 눈물이 흐른다. 후회라는 감정은 생소하며 끔찍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력하다. 공허한 외침.

소라야.

나는 이 파국을 구원할 수 없다. 네가 추락한다.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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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나서 처음으로 억울함을 느꼈던 적이 언제였더라.
 
 나는 잊지 않았던 기억들을 입속에서 읊조렸다. 망설이지도 않고 그것들은 튀어나왔다. 태초의 기억이 흐릿했다. 맞아, 나는 차별되고 구별되기 위해서 세상에 나온 몸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자 혀가 짓씹혔다. 빌어먹을. 어느새 불쾌한 기억들은 밀려나고 욕지거리가 입 안 가득 자리를 차지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래, 나는 자궁 밖으로 끄집어낼 때부터 남달랐고 그와는 정반대의 의미로 남들과 달랐다.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서 철들 무렵부터 안에서는 껍질을 벗고 밖에서는 적을 만들었다. 내 몸 안에는 터질 듯한 열기가 가득했고 그걸 본 사람들은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그것 또한 억울한 건 매한가지였어도 가만히 앉아 수를 놓으며 열을 삭히는 억울함보다야 나았다. 나의 역사는 곧 속박과 굴레의, 납작 엎드려야 하는 이가 고개를 드려는 투쟁의 역사였다. 抑鬱. 누를 억과 막을 울이라니. 내 인생을 이토록 잘 대변해 주는 단어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지 않은가. 이럴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신이 되고 싶다고 결정했을 때 나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바꿔 말하면 나는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그렇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잃을 것도 떨어질 곳도 없이 강하다고. 더 이상 눌릴 수도 막힐 수도 없다고.
 
 “흉.”
 
 나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씹어뱉었다. 흥분으로 거칠어진 숨이 발음 사이로 뒤섞였다. 그녀는 태연하게 나를 돌아보았다. 아씨. 화답하는 목소리는 참으로 건방지게도, 당황한 기색도 떠는 모양새도 보이지 않았다. 당장, 그거, 내려놓게. 말보다는 신음에 가까운 발음들이 간신히 문장을 이루었다. 보랏빛 입술이 호선을 그었지만, 오른쪽 관자놀이에 차갑게 닿은 총신을 붙든 그녀의 손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숨을 천천히 들이쉬려 안간힘을 썼다. 아씨. 흉은 나를 한 번 더 부른 후,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아씨의 안위를 위해섭니다. 저 하나만 희생하면 돼요.”
 
 눈을 질끈 감고 미친 듯이 고개를 내리저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이, 명백하게 나를 방해하려는 세력 중 하나의 짓이다. 그녀가 누구에게 어떤 협박을 들었건 내가 알 바 아니었다. 나는 맹세코 그들을 찾아내서 내게 애원할 때까지 경을 치고 죽여버릴 것이니, 그녀는 나를 위해서라는 같잖은 변명을 하며 이런 짓을 할 필요가 없다. 도리질은 계속되었고 가지런하던 머리칼이 엉망으로 흐트러졌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흉은 미묘한 표정을 했다. 그녀는 어린 시절 내 머리카락을 빗어주던 사람이었다. 그걸 떠올리자 명치께가 타들어갔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아씨. 잘 들으세요. 이젠 제가 없어도 혼자 해내셔야 합니다.”
 “닥치거라. 나불대지 마라.”
 “접근해 올 자칭 충신들을 믿지 마세요. 약한 모습도 보이지 마세요. 벼랑 끝에 서도 여유 있는 표정을 지으세요.”
 “허튼 짓 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게야. 너의 팔을 부러뜨리고 혀를 뽑을 것이야.”
 
 서로를 앞에 두고도 대화는 엇갈렸다. 악문 이가 갈렸다. 차마 발을 구를 수는 없었다. 내가 다가가려는 시늉이라도 하면 흉의 손가락이 쇠를 잡아당길 것만 같았다. 내 얼굴이 난생 처음의 꼴로 일그러지자 흉이 시선을 떨구었다. 굳게 힘을 주었던 턱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분명히 보았다. 나는 분노했다. 흉. 으르렁거리다시피 엉망인 부름을 듣고 고개를 들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는 눈빛이 확고했다. 그건 충견에게서나 볼 법한 눈이었다. 흉에게 어울리지도 않았다. 궁에서 가장 못났던 시종, 거둬주셔서 감사합니다. 간신히 들릴 정도로 그녀는 속삭였다. 나는 거의 숨을 쉬지도 못할 만큼 공포에 사로잡혔다.
 
 “아씨, 최고가 되세요.”
 
 뼈를 부수는 격발음에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그녀의 몸이 힘을 잃고 허깨비처럼 풀썩 쓰러지는 것은 찰나였다. 잠을 자듯 누운 등 밑으로 끈적끈적하고 적나라한 액체가 꿈틀꿈틀 바닥으로 퍼졌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손마저 땅에 닿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짐승처럼 그녀의 껍데기로 기어갔다. 벌벌 떨리는 손가락으로 옷자락을 잡자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네 년은 은혜를 이렇게 갚느냐!”
 
 양쪽 뺨을 타고 갈퀴 같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목이 메어 갈라지는 목소리로 절규했다. 네 이년, 감히 주인의 명을 어기다니. 네가 나를 거역하느냐. 큰 벌을 받아야 할 것이야. 당장 일어나지 못할까. 나는 그녀를 거칠게 잡아안고 흔들었다. 내가 선물했던 귀걸이가 흔드는 대로 속절없이 흔들렸다. 정확히 이유도 모른 채 나는 미칠 듯이 억울했다. 삶이 내게 이럴 수는 없는 것이었다. 어린 아이처럼 악을 쓰고 그녀의 품을 파고들어 얼굴을 묻었다.
 흉. 나의 시종이자 친구. 나의 심복. 나의 기반. 나의 허물이 찢겨나간다. 내 몸처럼 나를 감쌌던 존재가 강제로 분리되고 있었다. 나는 눈을 감지 못하고 몸부림쳤다. 오늘이 지나면 나는 아마 죽거나 살아남아 더 강해질 것이다. 그러나 산다 한들 그 생에 의미는 있는가.
 흉의 몸은 아직 따뜻했다. 우리가 어렸을 적, 견딜 수 없이 추웠던 겨울에, 억지를 써 끌어들여 한 이불 속에서 느꼈던 어느 날의 체온과 변함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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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봉숭흉을 이런 걸로 쓰다니,,,, 흑흑
그만큼 마지막이 너무 강렬했습니다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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