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봇온에 내는 림솔 위주 동림솔 책입니다.
동림솔이 함께 대도공대로 진학해서 동거합니다.
떡제본/40P/5000원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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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갑작스러운 초인종 소리에 눈을 떴다. 침대 옆에 발갛게 빛나는 전자시계를 보니 아직 해도 뜨지 않았을 새벽이었다. 보통 이런 시간에 일어나는 일이라면 좋은 것이 없다. 무거운 몸을 간신히 일으키는 사이 초인종 소리는 점점 빨라져 열 번도 더 날카롭게 울렸다. 대체 어떤 미친 놈이야. 가디건을 걸치고 안경을 찾아 쓰는 찰나, 불청객은 뭐가 그리 급한지 문까지 거칠게 두드려대고 있었다. 쿵쿵쿵쿵쿵. 그 소리에 맞춰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쯤 되니 무슨 심각한 일이 생겼나 싶어 마음이 급해져서,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않고 나는 대문을 열어재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건 어떤 계시에 가까운 느낌이었던 것 같다. 흔들리는 먹구름을 찢는 빛나는 회색 번개와도 같은, 강렬한 확신. 가슴이 아프기까지 한 불안감.

 차갑고 눅눅하고 습한 공기가 피부에 먼저 와닿았다. 냉기에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잠시, 나는 문고리를 잡은 채 얼어붙고 말았다. 잠은 모두 달아나버렸다.

 비에 흠뻑 젖은 왕소라가 서 있었다.


 “넌 다 알고 있었지.”

 “......”


 왕소라의 짧고 검은 머리카락이 온통 축축해져 창백한 뺨 위로 달라붙어 있었다. 현실감을 잃어버려 굳은 내 입보다 그녀의 입이 먼저 열렸다. 그리고 그녀의 그 말을 듣자, 나는 정말로 할 말이 없었다. 앞뒤를 잘라먹은 말이었어도 나는 이해했다. 이해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곧 절망에 휩싸였다.


 소라는, 알아버렸구나.


 그랬다. 나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녀에게만은 말하지 않으려 했다. 나는 간절히 바랐다. 기도하며 살아온 삶도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신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기를 바랐다.

 왕소라가 그냥 이대로 남은 시간을 살아가기를. 그녀의 예민하고 또렷한 눈이 실핏줄로 붉게 물들지 않기를. 그 희고 가는 손가락들이 고통에 떨지 않기를. 영영 무한한 시간 동안 아무 것도 모르기를.


 내 그런 행동들이 소용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부디.


 순식간에 손바닥이 날아왔다. 눈에 보일 만큼 심하게 떨고 있는 젖은 손에는 힘도 없었지만, 그녀와 눈을 마주치는 것이 힘겨워 나는 맞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왼쪽 뺨이 차가웠다. 와중에도 태연하게, 왕소라, 비 계속 맞으면 감기 들 텐데,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안으로 들일까 싶어 한 발짝 물러서자, 내 생각을 읽었다는 듯이 그녀가 내뱉었다.


 “권리모, 넌 정말 개자식이야.”


 나는 천천히 얼굴을 들어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잔뜩 쉬어버린 목소리와는 다르게 그녀는 무표정했다. 내가 말없이 그녀를 응시하고만 있자 가늘고 파란 목울대가 꿈틀댔다. 죽음을 앞둔 벌레처럼. 나는 시체처럼 차가울 그녀의 목덜미를 껴안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우리의 친우, 도운의 결혼.

 기뻐해야 할 그 소식이 서운해질 때마다, 그는 그만한 행복을 가질 자격이 있어, 라고 되뇌이곤 했다. 그는 빛 속의 인간이야. 나와 왕소라와 셋이서 어울릴 수 있던 시간이 기적과도 같은 이상한 일이었던 거지. 우리는 본질적으로 같지 않아. 도운은 우리와는 다른 인간이야.

 아내와 함께 있는 도운은 정말 행복해 보였다. 그 풍경이 그가 응당 있어야 할 곳이었다. 완벽하고 완전했다. 눈이 시릴만큼 눈부셨다.


 나는 알고 있었고, 말하지 않았다. 나는 왕소라의 눈먼 동경을 동정했다. 가망 없는 사랑을 하는 그녀의 바람을 지키고 싶었다. 아마 자기연민과 같은 맥락이겠지.

 도운을 바라보는 왕소라의 눈이 빛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나는 달군 돌조각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희망에 사로잡혔다가 절망으로 내동댕이쳐지곤 했다. 하지만 이제는 희망에 취하지도 못할 것이다. 전부 끝났다. 어차피 도운이 시작했던 관계였다. 도운이 없었다면 존재하지도 않았을 감정들. 애정들. 미련의 찌꺼기들. 도운이 없다면 더 이상 의미도 이유도 없는 추억의 잔예들.


 "감기 걸려...... 일단 들어와."


 내가 대신 목에 메었다.

 그녀는 의연하려 애썼다. 늘 그랬듯이, 자신의 꿈이 좌절될 때마다의 버릇처럼, 손에 힘을 주고 버티는 것이다. 빌어먹을 감정의 물살이 그녀를 꺾지 못하도록. 손을 잡아 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나는 도운이 아니니까.

 나는 권리모. 빛 속에 있는 도운만을 응시하는 어둠 속의 왕소라를 사랑하는 권리모. 왕소라가 나를 보게 만들 만큼 빛 속에 있지도, 차라리 내게 안기라고 소리칠 만큼 어둠에 속하지도 않은 멍청하고 무능하고 이기적인 권리모. 나는 도운에게 왕소라의 진심을 말하지 않았다. 또한 왕소라에게 너를 사랑하고 있다고도 말하지 않았다.


 왕소라의 본질은 고통이다. 절망이고 괴로움이다. 나는 그걸 알았고, 또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무너뜨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그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사랑하면서도 두려워했다. 그녀의 위태로움을 갈망하면서도 더 이상 그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다.

 그녀를 생각할 때면 항상 드라이아이스가 떠올랐다. 영점 아래의 온도. 주위에 존재하는 사람 모두의 숨통을 틀어막고, 남김없이 전부 소진되는 아름다움.

 왕소라는 불행해질 수 밖에 없는 인간이야. 절벽으로 하루하루 걸어가고 있다고. 그녀 주변에 머무르면 같이 불행해질거야. 나는 안 돼. 그녀를 구할 수 없을 뿐더러 지탱할 수 조차 없어. 도운이었다면 모르는 일이겠지만, 나는 아니야. 나는 못 해.


 "돌아갈게."


 내 길고 긴 머릿속 혼잣말의 틈을 비집고, 그녀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아차 싶어 그녀에게 고개를 돌렸다.


 절대 쏟아지지 않을 눈물이 가득 괸 완벽한 그녀의 옆얼굴을 응시하면서, 나는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어버렸다.

 왕소라는 내 모든 생각을 읽은 눈빛이었다. 그 이후에 내가 들었던 것이 그녀가 입 밖으로 낸 것인지, 나만이 들은 환청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도운도, 너도 나를 구원할 수 없어. 애초에 기대한 적도 없어. 오만하게 굴지 마. 내게 베푼다는 듯 행동하지 마. 내가 불행으로 죽어버린다 해도 그건 내 몫이야.


 왕소라는 왔던 것처럼 빗속을 걸어갔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그녀를 산산조각 내버릴 것 같았다. 마르고 희미한 그림자가 물안개에 가려 사라질 때까지 나는 허공을 응시했다.


 넌 젖을수록 투명해지는 꽃. 찢길수록 단단해지는 날개. 목이 졸릴수록 빛이 나는 별.

 왕소라, 제발. 제발 그만 아름답길.


 넌 추락하고 말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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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오랜만에 완성한 연성......

마라만님 동림솔 연성에 뽕차서 예전부터 쓰던거 부랴부랴 끝을 봤다

샤이니 종현 산하엽 들으세여 여러분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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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야, 너 미쳤어?"

권리모의 날선 목소리가 쟁쟁히 빈 교실을 울렸다. 내가 침묵했기에, 뒤를 잇는 것은 권리모의 거친 숨소리 뿐이었다. 권리모가 화를 낼 것은 진작에 예상했었다.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지만 함께 로봇을 만들 때만은 연신 웃어주던 놈이었으니까. 서로를 욕하고 무시하면서도 착실하게 정을 쌓던 녀석이었으니까.

"차도운, 너도 뭐라고 좀 해 봐. 왕소라가 드디어 미친 게 틀림없어. 그만두겠다잖아!"

그리고 그 외침에 자연스럽게 권리모와 나의 시선은 동시에 도운에게로 향했다. 이제 그만두겠다는 나의 선언을 들은 후부터 도운은 내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곁눈질로 살핀 그의 눈은 흔들리지 않았다. 권리모의 분노에 찬 혼잣말과 나의 계속되는 침묵에, 도운은 잠시 말을 고르더니, 입을 열었다. 평소처럼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나는 소라를 믿어. 소라도 무슨 이유가 있겠지."

도운치고는 의외의 행동이어서 나는 손가락을 꿈틀거렸다. 권리모처럼 화를 내지는 않더라도, 나를 붙잡을 줄 알았는데. 몇 번이나 그랬듯이, 나를 붙잡고 설득할 줄 알았는데.
하, 하고 권리모가 어이없다는 한숨을 쉬던 것이 기억난다. 도운은 그것 외에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권리모가 격앙되어 나와 도운에게 몇 마디를 더 쏘아붙였지만, 나도 도운도 대답하지 않았다.

분명 버리는 것은 나인데도, 버려지는 기분이 들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도운은 일이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 조용히 체념하고 대상을 이해하려 애쓰는 성격이었다. 화를 내는 것은 권리모의 역할. 경멸하는 것은 나의 역할. 그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어찌 보면 예상된 결과였다. 그가 말했듯이 그는 나를 믿었으니, 떠나는 내게 합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정말 내게는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야 한다는 적당한 명분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그에게서 묘한 배신감마저 느꼈다. 배신이라니, 오히려 그들이 내게 붙여야 할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지만 그랬다. 나는 차도운에게 배신감을 느꼈다. 당혹스러울 만큼이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나는 등을 돌려 교실을 걸어나왔다. 권리모는 내게 끝까지 고함을 질렀다.
그들을 두고 돌아서서 교실을 나오는 나의 뒷모습은 어땠을까. 셋이 함께한, 거의 완성된 프로젝트의 결말을 짓지 않고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차갑고 매정한 왕소라로 기억되었을까.
그러나 사실 나는 뒷문을 열면서도 오히려 도운이 나를 등지고 있는 것만 같아서 돌아보지 못했다. 내게서 등을 돌린 도운의 뒷모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상상돼서, 나는 떨며 눈물을 참았던 것 같다. 굴욕과 서운함. 그리고 마음 속으로 되뇌었던 애원들. 나의 벼랑 끝에서 현실에 발을 내딛으며 곱씹었던 흐느낌들.

안 돼, 도운. 날 버리지 마.
나를 이렇게 버리지는 마.

내가 정말 원했던 것이 과연 무엇이었는지.













그 날로부터 시간이 흘러 멀리 떨어진 지금, 네 얼굴을 보며 그 기억을 떠올린다. 이상하게도 그런 기억은 쉬이 잊히지 않는다. 네가 떨어지기 직전의 나를 찾아낸 이런 순간에는 더더욱.
버려진다는 기분이 들었던 것은, 그 때 네가 나를 붙잡아주길 바라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이제서야. 네가 나를 잡았어도 과연 내가 아버지의 집착과 가문의 굴레에서 도망칠 수가 있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결과가 어찌 되었든.

그리고, 이제 너도 내게 버려졌다고 생각하게 되겠지. 도운. 너는 나를 사랑하니까. 내가 너를 붙잡기를 바라니까. 한 번만 나를 용서해 달라고, 나와 함께해 달라고 하기를 바라니까.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너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나는 나의 고통을, 또 너의 고통을 덜기 위해 악을 쓴다. 악당이 된다. 날 너랑 같은 레벨로 취급하지 마.

하지만 너는 여전히 울 것 같은 표정이다. 버려지는 이의 눈빛이다. 나를 내려다보는 너의 눈빛이 너무나도 간절해서, 나는 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추락 직전에조차 눈을 감지 않는다. 버리고 싶은 건 네가 아니었는데. 원망해야 하는 것도 네가 아니었는데.

그렇지만 너는 죽는 날까지 나를 원망하겠지.

사실 나도 그래, 도운. 떨어지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나인데도, 이상해. 모르겠어. 버려지는 것 같아. 허공을 가르는 아찔한 감각에도 덮이지 않는, 이 상실감이라니. 이제는 정말 끝이라고 믿었는데. 모두 포기했다고 다짐했는데.

아마도. 나는 너를 사랑했겠지. 네가 나를 구원해 주기를 바랐겠지. 우리는 아무도 누군가를 구할 수 없는데도. 우리는 결국 서로에 의해 버려질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인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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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라 이야기 중 쓰고 싶었던 것을 마침 전력 주제가 좋길래.... 무임승차....(노답

장필순 - 그대로 있어주면 돼, Tom Odell - Long way down만 들으면서 썼당
Posted by 취_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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